“잘못한 건 그놈인데, 56년 전 그날을 잊을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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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세 최말자 할머니의 ‘미투’

56년 전 성폭력에 저항해 가해자의 혀를 깨문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은 최말자(왼쪽·74) 씨가 5일 (사)부산여성의전화 사무실에서 취재진에게 재심을 청구하게 된 배경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70대 노인이 된 최말자(74·여) 씨는 56년 전 성폭행을 당할 뻔했던 그날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잊을 수가 없지요. 구속되던 날 하루 종일 비가 쏟아졌던 것도, 검사가 소리치며 강압적으로 수사하던 것도 모든 기억이 생생합니다. 평생 한이었거든요.”

사건은 1964년 5월 6일 오후 8시께 경남 김해의 한 마을에서 벌어졌다. 당시 18세였던 최 씨는 집에 놀러 온 친구들을 데려다주려다 집 앞을 서성이던 21세 노 모 씨와 마주쳤다. 친구들이 노 씨 때문에 집에 가지 못하자, 최 씨는 친구들이 편히 집에 갈 수 있도록 노 씨를 다른 길로 유인했다. 으슥한 밤길에 둘만 남게 되자, 노 씨는 최 씨를 뒤에서 덮쳤다. 최 씨는 두 번을 가까스로 빠져나왔지만, 세 번째에는 노 씨가 다짜고짜 배 위에 올라타는 바람에 더 이상 저항할 수 없게 됐다. 노 씨는 성폭행을 시도했고, 최 씨는 입안에 들어온 노 씨의 혀를 깨물며 저항했다. 노 씨의 혀 1.5cm가 잘렸다.

성폭행 저항하다 억울한 옥살이
시민단체 도움 받아 재심 청구

가해자 혀 깨물어 잘렸다는 이유로
성폭행 피해자 아닌 가해자로 몰려
구속 수사 당하고 온갖 손가락질
“평생 한이 된 사건 바로 잡아야”

조용하던 마을은 발칵 뒤집혔다. 최 씨는 황당하게도 성폭력 피해자가 아닌 중상해 가해자로 몰렸다. 수사는 강압적으로 진행됐다. 검찰은 최 씨를 구속하고, 최 씨에게 중상해 혐의를 씌워 가해자로 몰아갔다. 정작 노 씨에게는 강간 미수가 아닌 특수주거침입, 특수협박 혐의만 적용됐다. 노 씨는 사건 이후에도 당당했다. 친구들과 최 씨 집에 몰려와 흉기를 들고 행패를 부리는가 하면, 최 씨에게 결혼을 요구하기도 했다. ‘결혼하지 않을 거면 돈을 달라’는 억지까지 부렸다.

더 황당한 건 수사기관이었다. 이들은 최 씨에게 ‘둘이 결혼하면 간단히 끝나지 않느냐’며 부추겼다. 재판부마저 “처음부터 호감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며 결혼을 권했다. 모두 <부산일보> 1964년 10월 22일 자 4면 ‘유죄냐 정당방위냐-혀 잘린 키스’ 기사에 기록된 사실이다. 이듬해 열린 1심 재판에서 최 씨는 중상해죄로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노 씨에게는 특수주거침입과 특수협박죄로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의 선고가 내려졌다. 구속수사를 받은 최 씨만 6개월간 구치소 생활을 해야 했던 셈이다.

구치소를 나와서도 주위의 시선은 최 씨를 더욱 옥죄었다. 동네 사람들은 들에서 일하다가도 ‘최말자 가시나 지나간다’며 손가락질하기 일쑤였다. 지금도 한으로 남은 당시 기억에 최 씨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잘못한 건 그놈인데, 그 모욕과 치욕은 모두 내가 견뎌야 했어요.”

50년 동안, 모든 억울함을 속으로만 삼켰다. 그러다 어릴 적부터 한이 된 공부를 하기 시작하면서 ‘피해자가 왜 숨어 살아야 하나’ 깨달았다. 최 씨는 방송통신대학에서 함께 공부하는 동기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털어놨다. 동기는 최 씨의 이야기를 듣고, 2017년 11월 한국여성의전화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다. 그렇게, 최 씨의 ‘미투’가 시작됐다.

사건이 발생한 지 꼭 56년 만인 6일. 최 씨는 한국여성의전화 도움으로 변호인단을 꾸려 부산지방법원에 재심을 청구한다. 최 씨는 “당시 재판에서 ‘정당방위’였음을 여러 차례 호소했지만,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세상이 달라졌지 않나. 이제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바로 잡고 싶다”고 말했다.

“용기가 없어서, 방법을 몰라 속앓이하는 나 같은 피해자들이 이 세상에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용기를 내니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많습니다. 상처를 끌어안고 평생을 살아가기엔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용기를 내서 꼭 자신의 삶을, 행복을 되찾길 바랍니다.”

서유리 기자 yo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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