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션 뷰] 코로나19와 ‘코리안 스탠더드’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김현겸 팬스타그룹 회장

한국의 코로나19 방역을 극찬한 세계적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은 저서 <경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에서 “민주주의는 경제 성장 단계에서 불필요할지 몰라도 위기 땐 진가를 나타낸다”라고 주장했다. 경제에 대한 민주주의의 순기능을 이처럼 명료하게 정의하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 코로나19 정국을 겪으면서 그의 말을 여러 차례 곱씹었다. 코로나19는 전 세계 많은 정부와 기업, 심지어 시민의식까지 ‘민주주의의 시험대’에 올려놓았다. 전시 수준의 전염병에 대처할 시스템을 평소 갖추지 못한 정부는 국력이나 경제 규모에 상관없이 직격탄을 맞았다. 체제 내부의 사회적 약점도 그 와중에서 속절없이 드러났다.

그러나 한국은 팬데믹 초기에 보인 국제 사회의 우려와 달리 위기관리에 비교적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코로나19에 따른 팬데믹 정국에서 한국이 전 세계로부터 이목을 끈 이유는 민주주의와 시민 협력을 전제로 한 ‘개방형 방역체계’와 민간 주도의 아이디어를 신속하게 수용한 민주 정부에 있었다고 본다. 특히 워킹스루와 드라이브 스루, 한국형 진단키트, 공적마스크 약국 전매 등은 민간 부문에서 다 제안됐고, 그것이 인터넷 기반의 강력한 ‘웹 민주주의’를 통해 수용됐다. 해외 언론과 석학들이 앞다퉈 한국의 선제 대응을 상찬한 것도 사실은 광범위한 ‘참여 민주주의’다.

민주주의·시민 협력으로 위기 극복
세계 표준 만드는 역량 스스로 입증
수소 선박 등 가능성 선제적 접근 땐
환경 문제 해결·관련 산업 주도권 확보

그런 점에서 확진자 급증으로 감염증 경보를 ‘심각’으로 격상시켜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시행한 2월 23일부터 ‘생활 방역’으로 전환한 지난 6일까지의 73일간은 단순히 지나가면 그만인 과거가 아니다. 전쟁에 준하는 자유의 격리와 경제적 피폐로 점철된 그 ‘73일간’은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세간의 표현처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이기에 더더욱 중요한 체험이고, 한편으론 ‘코로나19 이후의 새로운 미래’를 주체적으로 열어 갈 자양분이 될 수도 있다. 민주주의와 시민 협력을 전제로 한 위기관리 시스템은 이미 우리 의도와 상관없이 시나브로 세계 표준이 되고 있다. 그런 경험이 처음이기에 약간은 당황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표준을 만드는 역량을 우리 스스로 증명했고, 그것도 최대 글로벌 위기 속에서 이뤄냈다는 점에서 ‘코리안 스탠더드’의 시작을 알렸다고 본다.

필자는 세계해양포럼 기획위원장을 올해로 3년째 맡고 있다. 지난해에는 ‘축적’을 대주제로 해양산업의 새로운 미래를 논의했다. 그 논의의 핵심도 코리안 스탠더드였다. 선진국의 기술과 시스템을 빠르게 모방하는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 정책으로는 한국의 경제 성장은 더 이상 담보될 수 없다는 데서 코리안 스탠더드의 절실함을 부르짖었고 청중들의 공감을 폭넓게 얻었다. ‘세계 1위’로 불리는 조선산업은 단적인 사례다. 해외 로열티, 이른바 기술 이전료를 지불하고 나면 인건비가 수익의 전부나 다름없는 것이 한국 조선산업의 실체다. 원천기술이 없는 세계 1위는 허망하다는 얘기다. 더 싼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다면 순위는 뒤바뀔 수 있다. 최근 카타르의 LNG 운반선 1차 수주 경쟁에서 한국이 참패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코리안 스탠더드는 그래서 더 절실하고 절박하다. 다행히 코로나19에 따른 글로벌 경제 위기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물론 코리안 스탠더드가 말처럼 쉽게 구축되지는 않을 것이다. 단순한 정권 교체나 재벌 구조조정으로 글로벌 표준을 주도할 수도 없다. 코로나19 정국에서처럼 민간 부문의 아이디어, 즉 집단지성 활용에 우리 사회가 더 많은 관심을 가질 때 조금씩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필자는 그 가능성을 세계해양포럼에서 다룬 수소 선박 의제에서 어렴풋이 경험했다. 선진국이 다루지 않은, 새로운 가능성의 시장에서 우리가 선제적으로 코리안 스탠더드를 정립시킨다면 전 지구적 해양환경 문제의 해결은 물론이고 관련 산업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을 것이다. 문성혁 해양수산부 장관이 연초 내놓은 ‘글로벌 해양 모델 국가’ 선언도 그런 점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다만, 그것이 선언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정책으로 실현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뉴노멀은 이미 시작됐다. 경제활동 인구의 이동 제한, 국제분업 체계의 변화, 글로벌 실업 대란 등을 세계 언론은 ‘코로노미 쇼크(코로나19와 이코노미의 합성어)’란 용어로 압축했다. 세계의 거시 경제정책도 코로나19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다. 이 같은 격변 속에서 세계 GDP의 16.3%(2019년 기준)를 차지한 중국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밸류체인도 변화될 수밖에 없다. 지리적, 경제적으로 가장 긴밀한 우리는 더 큰 영향을 받을 것이다. 기 소르망의 기대처럼 우리는 늘 더 큰 위기 속에서 더 굳건한 공동체 의식을 발휘했다. 코로나19는 그래서 위기가 아니라 새로운 기회가 되리라 믿는다.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