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팝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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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순 소설가

어느 영화관이든 매표소 옆에는 매점이 있고 매점에는 팝콘기계가 있다. 유리관 안에 수북 쌓인 팝콘은 노르스름하고 고슬고슬해 보여 보는 것만으로도 먹음직스럽다. 많고 많은 간식거리 중에 영화관 매점에는 왜 꼭 팝콘을 파는지 알 수 없지만 언제부턴가 팝콘 없는 영화관은 생각할 수 없게 됐다. 그래서인지 팝콘 없이 영화를 본다면 어쩐지 억울할 것 같다.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본다면 영화 몰입에 다소 지장이 있는 줄 알지만 팝콘의 고소한 냄새를 뿌리치지 못해 산다. 팝콘 냄새는 온갖 것을 다 해줄 듯이 포근하다.

늘 그렇듯 직원은 커다란 통에 팝콘이 철철 넘치도록 담아준다. 기계에서는 연신 팝콘을 뿜어내고 직원은 눈덩이나 낙엽을 처치하듯 팝콘을 통에 쓸어 담는다. 나는 팝콘을 흘릴세라 통을 가슴에 안고 조심조심 상영관에 들어간다. 커다란 원통은 어림잡아 한 되가웃은 됨직 하지만 무게감은 전혀 없다.

영화 보면서 먹는 고소한 팝콘
이상하게 먹을수록 허기 몰려와
먹방·맛집 유혹, 속빈 강정 일쑤

내비게이션 탓에 알던 길도 잃고
스마트폰 시대 늘 정보에 굶주려
풍요 속에 빈곤이 도사리고 있어

스크린을 보면서 팝콘을 하나씩 입에 넣는다. 팝콘은 느끼한가 싶으면 짭조름하고, 고소한가 싶으면 밍밍하고, 바싹한가 싶으면 눅눅하다. 아무리 씹어도 냄새에서 상상했던 따스하고 고소한 맛은 나지 않는다. 울적한 기분마저 싹 지워줄 것 같았던 포근하고 달달한 냄새가 아니었던가. 이제 팝콘 맛은 무덤덤하다. 그래도 고소하게 풍겼던 그 냄새를 떠올리며 먹는다. 혀는 느끼한 버터 맛을 피해 자꾸 소금기를 헤집는다. 점점 씹다보니 팝콘이 아닌 버터 발린 스펀지를 먹는 것 같다. 그래도 자꾸 손이 간다.

입에 가득 팝콘을 넣고 어금니나 앞니로 꾹꾹 씹는다. 그러나 팝콘을 먹을수록 허기가 몰려온다. 그때부터는 한두 개가 아닌, 한 움큼씩 집어 입에 욱여넣는다. 팝콘 한 통을 다 비우다시피 먹었지만 포만감은커녕 팝콘 통만큼 속이 푹 파인 것 같다. 팝콘을 먹기 전까지는 없었던 허기다. 부지런히 손과 입을 놀려 먹었건만 속이 헛헛하다. 꼭 누군가에게 기만당한 것만 같다. 입안은 옥수수껍질이 맴돌고 입가에는 버터와 소금이 발려 있다. 그야말로 입만 버려놓았다.

비어 버린 커다란 팝콘 통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다. 나는 팝콘을 먹은 게 아니라 ‘뻥튀기’를 먹은 거다. 버터와 소금이 겉 발린 옥수수가 그 몸집 몇 배로 부풀러져 보송보송한 ‘뻥’으로 변신한 게 팝콘이다. ‘뻥’을 먹었기 때문에 먹을수록 허기졌던 거다.

아직도 굶어죽는 사람이 많다고 하지만 우리는 예전에 비해 먹을거리가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주위만 둘러봐도 주린 사람보다 많이 먹어 비만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그런데도 텔레비전 각 채널마다 앞 다투어 소위 ‘먹방’이라는 먹는 방송을 해댄다. 갈수록 ‘먹방’이 활개 치고 ‘맛집’이 넘쳐난다. 모두들 주림에 허덕인 것처럼 먹을거리를 탐한다는 것은 그들도 먹을수록 허기지는 팝콘만 먹었다는 거다. 냄새와 색깔에 이끌려 먹었지만 그것들은 대개 속빈 강정이었던 거다.

허기진 속을 달래려고 ‘먹방’을 보지만 그 또한 팝콘처럼 허허로움만 안긴다. 휑한 정신을 가다듬고 채워보려고 교양강좌를 찾아다니지만 그런 것들을 들을수록 마음은 허전하다. 온갖 정보를 담고 있는 스마트폰을 품고 있으면서도 지식과 정보에 주려 있다. 스마트폰을 열어보지 않으면 부모형제 전화번호도 외우지 못한다. 내비게이션 때문에 잘 알던 길도 잃어버렸다. 스마트폰이라는 팝콘 때문이다.

팝콘 인심이 좋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풍요 속에 빈곤이 그 안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팝콘을 씹을 때 눈치 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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