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무의식을 바꿔야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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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영철 독자여론부장

“연설 시간과 치마 길이는 짧을수록 좋다고 합니다. 이만 제 말을 줄이겠습니다.” 부산 모 기업체의 박 상무. 그가 이 말을 하는 순간 모임 분위기는 갑자기 싸늘해졌고 박 상무는 즉각 사과했다.

“김 대리는 빨간 라벨 소주잔, 박 과장은 파란 라벨 소주잔….” 또 다른 모 기업체의 이 부장은 최근 부서 회식에서 부원들에게 술을 권하며 이렇게 말했다. 소주잔을 받아든 김 대리는 “제가 왜 빨간 잔인가요?”라며 이 부장을 쳐다봤다. 당황한 이 부장은 “김 대리는 예쁘니까 당연히 빨간 잔이지”라고 얼버무리면서도 자신이 지금 왜 이런 식으로 말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구태 반복한다면
‘숨어 있는 진정한 자아’ 변화 시켜야
‘경직된 무의식’ 도태되는 새로운 시대
차기 부산시장 조건은 ‘건강한 내면’

박 상무와 이 부장은 평소 성 인지 감수성이나 양성 평등 의식이 보통 이상이라고 자부하는 소위 엘리트 사회인들이다. 이들은 자신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 즉시 자각할 정도의 능력도 갖고 있다. 평소 사내 교육이나 TV 등을 통해 성평등 관련 정보를 자주 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도대체 왜 한 번씩, 수시로 이러는 것일까.

잘못된 습관과 고정관념은 무섭다. 바꾸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박 상무 등의 사례처럼 제대로 숙지하고 있지만 자신도 모르게 순식간에 공든 탑을 무너뜨리는 사례는 허다하다. 심리전문가들은 무의식의 문제라고 진단한다. 즉, 알고 있고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내면 깊숙이 도사린 무의식, 잠재의식을 완전히 변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박 상무 등과 같이 ‘단순히 알고 있거나 외운 것’과 ‘무의식에 체화시켜 자신의 가치관까지 온전히 변화시킨 것’은 당연히 전혀 다른 결과를 도출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기도 하다. 쉽게 말하자면 무의식, 즉 ‘숨어 있는 진짜 자아’를 바꿔야 진정하게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무의식의 존재조차 깨닫지 못한다고 한다. 전문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무의식을 바꿔 진화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태아·영유아 시기부터 형성된 무의식에 도사린 결핍과 트라우마, 시대착오적인 인식, 편견, 인지 부조화, 성격장애적 요소 등 온갖 부정적인 것들을 치유·관리·업그레이드시키는 인문학적 공부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으면 누구나 부지불식간에 박 상무, 이 부장이 될 수 있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수많은 사건들의 상당수는 음주 등을 계기로 ‘나쁜 무의식’이 이성을 완전히 압도하는 순간에 발생했다는 한 심리학자의 말도 이런 뜻을 담고 있다.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성범죄 사건도 무의식의 영역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그는 분명 다방면에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그런 행위를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어쩌면 무의식에 숨어 있는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간과하거나 방치한 것이 오 전 시장의 가장 큰 잘못일지도 모른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와 오 전 시장 사태처럼 지도층의 성범죄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무의식의 질’이 ‘리더의 질’을 결정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오 전 시장 사건과 관련, 부산지역 8개 언론사 기자들이 ‘성범죄 보도 세미나’를 지난 2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한 기자는 오 전 시장 사건의 취재 후일담을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진짜 공부를 열심히 하거나 직접적인 피해 경험이 없으면 (피해자의 심정을)공감하기 어렵고,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기사 마감 직전)기사 방향을 순식간에 결정해야 할 때 (주변의 편견에도)성범죄 피해자를 보호하는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리려면 평소에 굉장히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결국 무의식에 아로새길 정도로 체화되지 않은 ‘얕은 지식 습득’은 모래성에 불과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지금, 세상은 엄청난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관습, 규범, 사회정의의 질과 수준도 시시각각 진화하고 있다. 기존의 불합리와 편견, 반지성적 관행은 속속 종언을 고하고 있다. 어제까지 허용된 관행이 내일은 구태로 전락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변화를 무시하더라도 ‘운좋게 잘 살 수 있었던 시대’는 지나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듯 ‘경직된 무의식’으로는 도저히 살아 낼 수 없는 새로운 세상으로 우리는 이미 진입했다. 껍데기가 아닌 뼛속까지 바꿔야 살아 낼 수 있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전문가들은 자기안에 숨은 또다른 진짜 나, 무의식을 치열하게 들여다보면서 변화에 발빠르게 적응해야 한다고 연이어 강조한다. 나아가 차기 부산시장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게 자신의 무의식까지 제대로 관장할 수 있는 인물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cyc@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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