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말 광] < 859 > 토씨가 문장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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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원 교열부장

<韓 남녀 배구 20년 만 올림픽 동반진출 노린다>

이 어느 신문 제목, 어떠신가. 과연 ‘20년 만에’ 한국 남녀 배구가 올림픽 동반 진출을 노리는 것으로 읽히시는가. 혹시라도 그렇다면, 그건 오독이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이 제목은 한국 남녀 배구가 딱 ‘20년 동안만’ 올림픽 동반 진출을 노린다는 것. 기한부라는 얘기다. 그러니 의도를 제대로 전달하려면 저 제목은 이래야 했다.

<韓 남녀 배구 20년 만에 올림픽 동반진출 노린다>

이처럼, 토씨(조사) 하나 잘못 써서 엉뚱하거나 어색한 문장이 되는 일은 드물지 않다.

‘대소변이 잘 안 나오고 시원하지 않아 노폐물이 쌓이는 사람의 경우는 대소변을 시원하게 하는 약을, 스트레스가 과도해 그로 인해 과잉식욕이 생긴 비만 환자에겐 마음을 안정시켜주고 포만감을 주는 한약이 훨씬 효과적이다.’

이 문장을 간단히 줄이면 ‘…약을, …한약이 효과적이다’가 된다. ‘약을’이 서술어 ‘효과적이다’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다. 여기선 ‘약이’가 올바른 토씨 사용법이겠지만, 아예 토씨 없이 ‘약’만으로도 충분했다. 말실수를 줄이려면 말수를 줄여야 하듯이, 비문을 줄이려면 어떻게든 글자 수를 줄이는 게 요령.

‘2010년 매월 80만5천340원의 노령연금을 받았던 A씨는 2019년 12월 현재 다달이 95만760원을 수령하고 있다. 10년 정도 흐르는 사이에 연금액이 1.2배가량 늘어났다.’

이 기사에서 ‘1.2배가량’은, 과장해서 말하자면, 거의 사기 수준이다. 80만 5천340원이 95만 760원이 됐다면 18% 정도 늘어난 셈. ‘1.2배가량으로’ 늘어난 것이다. 한데, 1.2배가량(이) 늘어났다고 했으니, 늘어난 액수가 1.2배라는 얘기가 된다. 즉, 지금 받는 노령연금에서 ‘1.2배가량으로’ 늘면 95만 760원이지만, ‘1.2배가량이’ 늘면 175만 5000여 원이 되는 것. 토씨 하나 잘못 쓴 것치고는 너무 큰 차이가 아닌가.

‘그는 인사동 선천에서 정기적인 식사모임을 열어 노변정담을 즐겼다. …물론 계산은 언제고 이대원이 맡았다.’

어느 신문 칼럼 구절인데, 이대원 화백이 밥을 잘 샀다는 내용. 한데, ‘언제고’라는 말 한 마디 때문에, 더 정확하게는 ‘언제’ 뒤에 붙은 접속 조사 ‘고’ 때문에 이 화백이 밥을 잘 사지 않았다는 뜻이 돼 버렸다. ‘언제고 그럴 줄 알았다’에서 보듯이 ‘언제고’에는 ‘항상, 늘’이란 뜻이 없기 때문이다. ‘언제고 밥 한번 먹자’라면 ‘언제나 밥 한번 먹자’가 아니라 ‘언젠가 밥 한번 먹자’가 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글자 한 자, 토씨 하나가 이렇게나 무섭다.

jinwo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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