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종의 망각의 저편] 전쟁과 문학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작가·추리문학관 관장

해마다 6월이 오면 한국전쟁의 고통과 비애가 안개처럼 스며든다. 비록 어린 나이에 겪었지만 그것은 나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주제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

전쟁이 일어나던 해, 나는 서울 필동에 살고 있었는데 열 살 어린 나이로 소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일요일로 기억되는 그날,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돌더니 며칠 후 아침에 일어나보니 낯선 군인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놀랍게도 대부분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어린 소년병들이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조랑말이 끌고 가는 대포 앞에 서서 회초리를 휘두르는 소년병이 인상적이었다. 소년병은 조랑말과 대포 사이에 서 있었는데, 내 눈은 피범벅이 되어 있는 조랑말의 잔등에 박혀 있었다. 무거운 대포를 끌고 북한에서 서울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얻어맞았으면 저렇게 피투성이가 되었을까. 어린 소년병보다 조랑말이 더 불쌍해 보였다. 어린 나이에 겪고 느꼈던 이런 감성이 내 머릿속에 전쟁에 대한 서사를 하나하나 채워주었던 것 같다.

전쟁 문학의 최고 가치는 현장성
피란수도 부산 배경 <밀다원 시대> 이후
한국 문학은 한 걸음도 못 나아가
생생한 체험 담은 해외 걸작들과 대조적

전쟁이 일어난 해에는 갑작스레 당한 일이라 피란을 못 갔지만 이듬해 중공군이 밀고 내려왔을 때는 모두가 공포에 사로잡혀 너도 나도 짐을 싸 들고 피란길에 나섰다. 저 유명한 1·4 후퇴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피란길이라고 해야 부산이 종착역이었고, 더 이상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 부산 부두는 아수라장이었다. 수백만 명이 일거에 몰려든 부산은 피란민들로 미어터져서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아우성으로 밤낮이 따로 없었다.

만일 한국전쟁에 대한 서사를 쓸 생각이라면 앞에 말한 부분도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한 모퉁이에 지나지 않고 본질이 빠져 있어 너무 허전함을 금할 수 없다. 전쟁의 본질은 현장성에 있다.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모습을 생생히 그려 낼 수 있어야 전쟁문학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문학에는 그와 같은 전장의 처절한 모습을 담아낸 작품이 없다. 거의가 전쟁으로 피폐해진 모습들만 단편적으로 그려 낸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대표적인 작품이 김동리의 <밀다원 시대>이다. 동리는 당시 30대 후반의 나이로 부산에서 피란살이를 하고 있었다. 밀다원은 광복동에 있던 다방으로, 피란살이에 지친 문인들이 시대를 한탄하면서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내던 곳이었다. 그때 그곳을 출입하던, 생기를 잃은 문인들의 모습을 담아낸 단편소설이 <밀다원 시대>이다.

한국 문학은 여기서 앞으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채 정체되고 만다. 만일 혈기왕성한 나이의 동리가, 전쟁의 한복판에서 젊은 나이에 피란살이를 체험했던 그가, 전쟁이라는 참상을 꿰뚫어 보는 혜안과 야심이 있었다면 한국전쟁 현장의 처절한 모습을 담아낸 전쟁문학을 창조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밀다원 시대>와 <흥남 철수>를 쓴 것으로 전쟁의 비극을 마감한다. 다른 작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누구도 3년 동안 수백만 명이 죽어간 전쟁의 참혹함을 생생히 그려 낸 작가가 없었고, 따라서 한국전쟁의 대서사시는 산산이 부서진 채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한국 작가들과 달리 외국 작가들은 전장의 한복판에서 겪은 그 비극을 문학으로 훌륭히 승화시키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레마르크의 <사랑할 때와 죽을 때>, 노먼 메일러의 <나자와 사자(The Naked and the Dead)>가 있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는 독일군 입장에서 러시아 전선에서 패퇴하는 병사의 삶과 죽음을 그린 대작이다. 미국 작가 노먼 메일러는 <나자와 사자>에서 태평양 전투에 투입된 미군 병사들의 비극을 사실적으로 그려 내고 있다. 작가 자신이 직접 전투에 참가했던 경험을 토대로 작품을 썼기 때문에 한층 실감이 나고 박진감이 있다.

이 밖에도 미국 작가 어윈 쇼가 쓴 <젊은 사자들(The Young Lions)>이 있다. 어윈 쇼 역시 제2차 세계대전에 직접 참전했던 경험을 녹여 이 작품을 썼는데 세 주인공이 교차해서 등장하면서 그들의 도전적인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한편 이 작품은 소설 작법 측면에서 실험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다채로운 스타일과 다양한 소설적 기법이 자유로이 구사돼 20세기 소설 작법의 진수를 보여주는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전쟁소설로 빼놓기 아까운 작품이 또 하나 있는데, 일본 작가 고미가와 준페이가 쓴 <인간의 조건>이다. 태평양 전쟁을 배경으로 만주에서 자행된 인간성 파괴와 가혹 행위를 처절하게 그려 낸 반전소설이자 휴머니즘 소설로, 출판 당시 일본에서 1500만 부가 판매됐을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작품이다.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