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단상] 오거돈 사건과 노무현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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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호 서울 정치팀 부장

2002년 대통령 선거 때 민주당 대선 후보 노무현을 담당했었다. 언론계 용어로 소위 ‘노무현 마크맨’이었다.

옆에서 지켜본 노무현은 자신의 말과 행동에 따른 유·불리를 따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스스로 옳고 바르다고 생각하면 나중에 어떤 손해를 보더라도 원칙을 지켰다.

대권 경쟁자인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TV토론에서 ‘옥탑방’이 뭔지 모른다고 해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명문고교와 서울대를 졸업한 엘리트 법관이라서 서민들의 삶도 모른다는 비난이 이회창에게 쏟아졌다.

그런데 노무현은 다음 날 방송에서 “나도 사실 옥탑방이 뭔지 몰랐었다”고 고백해 참모들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훗날 노무현은 “하루 전에 경쟁자의 토론내용을 보고 안 사실을 평소에 알고 있었던 것처럼 얘기한다면 거짓말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한 순간 유리한 상황이 펼쳐졌다고 해서 자기 자신까지 속일 수 없다는 노무현 다운 행동이었다.

성추행 사건으로 오거돈 전 부산시장이 사퇴했음에도 여전히 시민들의 머리 속에는 여당 쪽 인사들이 4·15 총선 전에 이를 알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아있다. 사건은 선거 전에 발생했고, 사퇴는 선거 이후 이뤄졌으니 그런 궁금증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성추행 가해자의 공직사퇴를 ‘공증’한다는 유례없는 일이 어떻게 이뤄졌느냐가 그 궁금증의 핵심이다. 더군다나 공증을 맡은 법무법인의 대표가 노무현의 조카사위이자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사무실을 운영한 정재성 변호사라는 점은 누구에게든 ‘왜?’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이런 상황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여러가지 관점에서 합리적 추론을 해보는 것은 민주사회 언론의 기본 책무이다.

그런데 정 변호사의 대응이 놀랍다. 그는 SNS 글에서 특정 기사를 지목하며 “‘알려졌다’ ‘보인다’ 등 팩트에 자신없을 때 사용하는 전형적 표현으로 증권가 지라시 수준이다. 제발 이성을 회복하기 바란다”면서 ‘몰락’이라는 악담을 했다.

‘성추행 사건을 공증한 법무법인이 오 전 시장을 변호하는게 적절하냐’고 문제제기한 언론에는 유려한 법률논리를 내세워 ‘사과’를 요구했다.

정 변호사는 2018년 지방선거 때 오거돈 캠프의 인재영입위원장이었다. 여당 인사들과 실타래처럼 많은 인연으로 얽힌 법무법인이 여당 당적을 가진 가해자 사건의 공증을 맡았다. 이 사실만으로도 여러가지 정치적 논란이 불 보듯 뻔하다. 정 변호사가 이를 몰랐다면 무감각한 사람이고, 알고도 그랬다면 정치적 이해득실 앞에서 떳떳하지 못한 것이다.

모든 의혹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독자와 시민들을 대신해 문제제기를 하는 언론을 비난하는 것은 본질을 흐리는 비겁한 행위이다. 이번 사건에서 그가 처음으로 했어야 할 말은 “피해자 보호를 위해 불가피했었다. 결과적으로는 신중하지 못했다”고 경위를 설명하고 유감을 표하는 것이었다.

만약 이번 사건 당사자들이 사퇴 공증을 위해 ‘변호사’ 노무현을 찾아갔더라면 어땠을까. 기자가 아는 노무현이라면 “제가 이 사건을 맡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라며 돌려보냈을 것이다.

그것이 친노·친문들이 진정으로 지키고 계승해야할 ‘노무현 정신’이다. psh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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