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권의 핵인싸] 과학과 함께(Con-Science, 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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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물리학과 교수

끝이 없다. 누구도 이토록 오래갈 줄은 몰랐다. 심지어 아직도 언제 끝날지 모른다. 이번 가을엔 다 지나갈 것이고 당연했던 일상도 다시 회복되리라 내심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니다. 언제 끝날지를 기다리는 것은 이제 부질없어 보인다. 이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터널 속에서 슬기롭게 살아갈 고민이 필요하다. 포스트 코로나가 아니라 코로나와 함께 살아갈 지혜가 필요하다. 우리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비말(침방울)이 색을 갖는다고 상상해 보자. 입을 열 때마다 가루와도 같은 비말이 휘날리며 주위로 번진다. 기침이라도 하면 폭발과도 같은 엄청난 비말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2m 넘게 날아간다. 눈에 보이는 거의 모든 곳이 온갖 비말로 얼룩져 있음은 물론, 숨 쉴 때마다 콧구멍으로 각양각색의 비말이 섞여 들락날락한다. 하얀 공깃밥 위에, 국그릇과 반찬들 위에 여러 색깔의 비말들이 꽃가루처럼 뿌려져 있다.

코로나 이후 비대면 온라인 평가 틈타
특정 대학서 조직적 대규모 부정 행위
양심은 우리를 지켜 내는 보루가 돼야

수저로 음식을 먹을 때마다 나의 비말과 다른 이들의 비말이 풀어져 섞인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형광빛이라면, 마침 바닥이나 문고리에 형광빛이 묻어 있다가 알코올 소독제를 뿌리자 금방 그 빛을 잃는다. 마스크를 통해 숨이 드나들 때마다 마스크 바깥쪽으로 형광빛과 각양각색의 비말들이 춤추고 있다. 실내에서 마스크도 벗고 아무렇지도 않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차 한 잔 하고 밖으로 나설 때에야 비로소 마스크를 착용하는 우스운 일들이 이때도 가능할까? 이때도 입에서 연신 형광빛 비말을 날리며 노래방과 찜질방,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PC방을 아무렇지도 않게 나다닐 수 있을까?

도덕이나 배려의 문제가 아니다. 과학의 문제다. 흔히 과학을 숫자와 무슨 법칙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으나, 과학은 자연을 바라보는 가장 정직하고도 본질적인 시각을 갖는 것이며, 실감하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반응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의료진들이 늘 환자들과 부대끼면서도 방역과 위생이 자연스럽게 체화된 것은 감염의 위력을 알고 실감하기 때문이다. 머리로만 이해하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이 와중에, 불가피했던 비대면 온라인 평가의 틈새로 대규모 부정 행위가 조직적으로 있었다. 그것도 이 사회의 미래 최상위 엘리트가 약속된 명문대, 유망학과의 초년생들이다. 모르긴 해도 밝혀지지 않거나 알려지지 않은 경우는 더 많았을 것이다. 심지어 이것이 부정 행위를 제대로 감시·통제하지 못한 시스템 탓이라며, 이들 부정 행위 학생들의 징계 수위에 대한 염려가 회자된다.

코로나 전쟁의 고생스러운 피난살이 중에 우리 아이들끼리 서로를 등쳐 먹는 꼴이라니. 이것은 상황의 어려움을 틈탄 자기와 타인을 기망한 명백하고도 중대한 조직적 범죄가 분명한데도, 모두들 딴 얘기들뿐이다. 징계가 능사는 아니라지만, 한 과목만이 아니라 해당 학기 모든 성적을 낙제로 처리하여 엄중히 징계해야 하는 중대한 범죄인데, 해당 과목 0점 처리로 마무리하는 분위기다.

어쩌다가 우리가 이렇게까지 됐을까. 이것이 몇몇 아이들만의 문제일까. 우리 아이들은 도대체 어디서 이런 걸 배웠을까. 이 나라의 교육은 도대체 무엇을 가르쳤는가. 정작 자기 자신을 기망한 자기 책망과 반성은커녕, 남을 기망한 데 대한 징계와 집단 유급만 걱정하고 있는 이 사회는 도대체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도 추첨을 통해 중·고등학교를 배정받았던 소위 뺑뺑이 세대이고, 여느 세대 못지않게 입시에 시달린 세대다. 빡빡머리에 시커먼 일본식 교복의 남학생들이 득실거리는 정글과 같던 학교에 다녔다. 선생님의 학생 체벌은 예사고, 폭행에 가까운 손찌검까지도 일상적이었던 그때에도, 진짜 선생님이 계셨다. “실력 이전에 양심이라고! 양심도 없는 주제에 커닝으로 성적 잘 나와 봐야 도둑놈이지. 그렇게 성공해 봐야 어디에 쓰겠냐. 무감독 시험을 할 정도는 돼야 비로소 선진국이 되는 거야.” 남들에 대한 기망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기망이 얼마나 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일이란 것을 가르쳐주셨던 어른이 있었다. 지금의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남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기망하는 일은 정직한 자연을 거스르는 대단히 작위적인 일이다. 그 대가가 아무리 크기로서니,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정도에 견줄 수조차 있을까. 이 일이 한 번쯤 해 볼 만한 일탈이라면, 이 사회는 얼마나 뻔뻔한 사람들의 홍수란 말인가. 양심(Conscience)은 있어도 없어도 되는 옵션이 아니라, 이 세상을 보는 정직한 눈과 느낌의 ‘과학과 함께’(Con-science) 우리 안에 내재돼야 할 근원이다. 일상이 무너져버린 이 엄중한 코로나 시대에 그나마 우리 자신들을 지켜 낼 보루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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