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마리 앙투아네트’ 어린 시절 추억 고스란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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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인문학 기행] 11. 오스트리아 빈 호프부르크 궁전

오스트리아 빈의 헬덴 광장에서 바라본 노이에부르크 윙 전경. 나폴레옹에 맞서 싸웠던 카를 폰 외스터라이히의 동상이 궁전을 향해 팔을 높이 치켜들고 있다.


18세기 유럽에서 가장 유명했던 여성은 프랑스의 왕후 마리 앙투아네트가 아닐까. 프랑스대혁명의 돌풍에 휩싸여 파리 콩코르드 광장의 단두대에 목을 내밀어야 했던 비운의 인물이었다. 오스트리아 빈의 호프부르크 궁전에는 결혼하기 전까지 그녀의 추억이 곳곳에 담겨 있다. 그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어보러 그곳으로 들어가 본다.

합스부르크 왕가 궁전으로 사용
언니 대신 프랑스 왕세자빈 된 앙투앙
이 궁전서 작별 파티 후에 빈 떠나
노이에부르크 윙·미하엘 윙 등 궁전
왕궁 정원 모차르트 동상·시시박물관
많은 시민·관광객 몰리는 명소 각광 


■합스부르크 황실의 막내

1755년 11월 2일 밤 8시 30분 호프부르크 궁전의 한 침실에서 귀여운 여자 아기가 태어났다. 산모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여걸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였다. 새아기는 그녀의 열다섯 번째 자녀이자 막내딸인 마리아 안토니아 조세파 조안나였다. 가족은 그녀를 ‘앙투앙’이라고 불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여름에는 새벽 4시, 겨울에는 6시에 일어나 하루 일정을 시작해 거의 자정이 다 돼서야 마쳤다. 어린 자식을 돌볼 틈조차 없이 바빴다. 앙투앙은 태어나자마자 다른 오빠, 언니처럼 유모에게 넘겨졌다. 그녀는 첫 겨울을 호프부르크 궁전의 육아실에서 보냈다.

앙투앙이 네 살이 될 때까지 가족 말고는 아무도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녀가 공식 무대에 데뷔한 것은 1759년 아버지 프란츠 슈테판 황제의 생일 축하 파티에서였다. 부모는 물론 귀족, 황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는 호프부르크 궁전에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당시 빈 궁정의 분위기는 격식에 별로 얽매이지 않고 느슨한 편이었다. 프란츠 슈테판의 영향이 컸다. 그는 국정을 부인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모두 떠맡기고 한량처럼 편안하게 살았다. 그는 여러 딸에게 식물과 꽃, 그리고 정원을 좋아하고 가꾸는 성격을 물려주었다. 앙투앙은 다른 형제자매처럼 아버지를 무척 좋아했다. 반면 어머니는 사랑과 존경에 두려움이 깊게 섞인 눈으로 바라봤다. 그녀는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어머니를 정말 사랑해요. 한편으로는 매우 무서워하기도 하지요. 먼 거리에서 어머니를 보기만 해도 가슴이 콩콩 뛴답니다. 어머니에게 편지를 쓸 때 마음이 편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앙투앙의 형제자매는 호프부르크 궁전에서 함께 연극하고 노래를 부르거나, 서로 어울려 춤을 추며 놀았다. 겨울에는 궁전 정원에 나가 썰매를 탔다. 여름에는 쇤브룬 궁전에 가서 무더위를 피했다.

1762년 앙투앙이 여섯 살 때 호프부르크 궁전에서 음악 연주회가 열렸다. 공연자는 당시 천재 꼬마 음악가로 칭송받던 모차르트였다. 연주를 마치고 돌아 나오던 모차르트는 마루에서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다. 앙투앙은 쪼르르 달려가 동갑내기인 모차르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고는 뺨에 키스했다. 모차르트는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좌중에서는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는 정말 친절하구나. 나중에 너랑 결혼하고 싶어!”



■갑작스러운 프랑스 행

앙투앙의 언니 마리아 캐롤리나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셋째 딸인 그녀는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손자인 루이와 결혼할 예정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정부는 앙투앙을 대신 결혼시키기로 합의했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앙투앙은 상당히 예뻤고, 피부는 밝은 핑크빛이었다. 성격이 발랄하고 표정이 늘 환해 상대에게 호감을 주었다. 춤을 잘 췄고 자수를 좋아했으며 하프 연주를 즐겼다. 당시 빈 주재 프랑스 대사는 그녀를 ‘우아한 매력덩어리’라고 평가했다.

앙투앙의 외모 중에서 단 한 가지 문제는 울퉁불퉁한 치아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랑스의 치과의사를 호프부르크 궁전으로 불렀다. 의사는 앙투앙에게 치아교정기를 착용하게 했다. 결혼식 직전까지 교정기를 쓴 덕분에 그녀의 치아는 상당히 가지런해졌다.

앙투앙은 프랑스어를 읽거나 쓸 줄 몰랐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루이 14세에게 좋은 가정교사를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애비 드 버몽이라는 교사가 호프부르크 궁전으로 건너갔다. 그는 학습지진아 상태였던 앙투앙을 똑똑한 숙녀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성과가 미흡했다”고 그는 나중에 고백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딸이 프랑스의 왕세자빈 자리에 오를 준비를 완벽하게 마무리했다고 보았다. 그녀는 당대 최고의 화가를 불러 앙투앙의 초상화를 그리게 해 파리로 보냈다. 루이 14세는 손자며느리의 초상화를 보고는 매우 흡족해했다.

1770년 4월 19일 결혼식을 치르기 위해 프랑스 파리 베르사유 궁전으로 떠나는 앙투앙을 위한 작별 파티가 호프부르크 궁전에서 열렸다. 이틀 뒤 앙투앙은 어머니와 형제, 친구 및 모든 국민에게 작별 인사를 남기고 황금과 유리로 장식한 마차에 올라 빈을 떠났다. 이것이 빈에서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2주일 뒤 앙투앙을 태운 마차는 스트라스부르에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국경을 넘었다. 그녀는 월경 직후 오스트리아에서 입고 온 옷을 모두 벗어 던지고 프랑스 왕실에서 보내온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때부터 그녀에게는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새 이름이 붙여졌다.



■제국 황제의 궁전

호프부르크라는 이름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궁전의 성’이다. 원래 이곳에는 13세기까지만 해도 오스트리아 공작의 저택이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저택은 점점 확장됐고, 14~16세기와 17~19세기 초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궁전으로 사용됐다.

자연사박물관이 있는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에서 길을 건너가면 매우 인상적인 C자 모양 건축물이 나타난다. 바로 노이에부르크 윙이다. 1860년대 빈을 감싸고 있던 성벽을 허문 뒤 궁전을 확장하면서 만든 곳이다.

이곳에는 에페소스 박물관, 무기기념관, 고대악기기념관 등이 들어 있다. 노이에부르크 뒤편에는 잔디로 덮인 왕궁 정원이 있다. 빈 시민들은 이곳에 드러누워 일광욕을 즐기면서 편안하게 오후를 보내곤 한다. 이곳에는 아주 낯익은 동상이 하나 서 있다. 오스트리아 최고의 음악가 모차르트의 동상이다.

호프부르크 궁전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황후로 유명했던 시시의 이름을 딴 시시박물관이다. 이곳에는 그녀가 궁전에서 살 때 사용했던 가구, 식기 등과 각종 여행용품을 전시하고 있다.

노이에부르크 궁전을 지나 콜 마르크트 거리 쪽으로 가다 보면 다시 돔 지붕이 있는 C자형 건물이 나타난다. 원래 호프부르크 궁전이었던 미하엘 윙이다. 건물 앞 미하엘 광장에는 마차 여러 대가 늘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다. 이 건물 앞에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이 적지 않다. 웅장한 건물과 마차를 배경으로 삼으면 중세시대 분위기를 풍기기 때문이다. 앙투앙이 파리로 떠나는 마차에 올랐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글·사진=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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