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말 광] 860. 그건, 도르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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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원 교열부장

‘현판에 ‘꽃피는 집’이라고 길게 내리다지로 써서 대문 기둥에 내걸었다.’

이 문장에서 ‘내리다지’는 잘못이다. 저런 우리말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주룩주룩 봄비를 읽어간다/세로글 내리닫이로 속도를 높여간다.’

이 글에 나온 ‘내리닫이’도 전혀 문맥에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표준사전)을 보자.

*내리닫이: 두 짝의 창문을 서로 위아래로 오르내려서 여닫는 창. =내리닫이창, 오르내리창.

그러니 ‘글씨를 위에서 아래로 써 내려가는 일. 또는 그런 방식’을 뜻하는 말이라면 ‘내리닫이’ 대신 ‘내리쓰기’나 ‘세로쓰기’라 쓰면 된다. 한자말로 하자면 '종서(縱書)'가 될 터. ‘내리닫이’에는 ‘바지와 저고리를 한데 붙이고 뒤를 터서 똥이나 오줌을 누기에 편하게 만든 어린아이의 옷’이라는 뜻도 있다.

한편, 옆으로 밀어서 열고 닫는 문은 ‘미닫이문’이라 한다. 아래는 어느 소설에 나오는 문장.

‘미닫이로 열리는 격자 유리창 달린 현관문은 문짝 아래 작은 도르래가 있고 문턱에 철선이 있어서 조금만 힘주어 밀면 드르륵하면서 활짝 열렸다.’

여기 나온 현관문이 바로 옆으로 밀어 여닫는 미닫이문이다. 한데, ‘도르래’는 잘못. 표준사전을 보자.

*도르래: 바퀴에 홈을 파고 줄을 걸어서 돌려 물건을 움직이는 장치. 두레박, 기중기 따위에 이용되며, 고정 도르래와 움직도르래가 있다.

미닫이문 아래에 다는 조그만 바퀴가 아니라 두레박·기중기에 쓰는 커다랗고 동그란 바퀴가 도르래인 것. 한자말로는 ‘활차(滑車)’라 한다. 도르래의 기능은 적은 힘으로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거나 옮기는 것. 실제로, 수원 화성을 지을 때 정약용이 발명한 거중기는 도르래가 모두 8개나 들어갔는데, 들이는 힘보다 무려 600배나 무거운 돌을 들어 올렸다 한다. 반면, 미닫이문에 달린 바퀴는 물체가 잘 구르게 하므로 도르래와는 생김새뿐만 아니라 역할마저 다른 것.

그러면 이렇게, 잘 구를 수 있도록 미닫이문에 다는 조그만 바퀴는 뭐라 부를까. 표준사전을 보자.

*호차(戶車): 미닫이가 잘 여닫아지도록 문짝 아래에 홈을 파고 끼우는 작은 쇠바퀴.

이러니, 이 작은 바퀴는 도르래가 아니라 ‘호차’라고 써야 한다. ‘문바퀴’라고 해도 된다. ‘미세기, 미닫이 따위의 문 밑에 파 넣어 문이 레일 위를 구르게 하는 바퀴’라는 뜻.

그러고 보면 역시 언어 실력이란, 비슷하게 생긴 말들을 구별해 쓰는 능력이기도 하다.

jinwo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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