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부채의 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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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언월도가 관우를 상징하고 장팔사모가 장비를 상징한다면, 제갈량을 상징하는 것은 부채다. 제갈량은 여러 곤경에 처할 때마다 부채를 살살 흔들며 해법을 찾아낸다. 지모와 지략의 화신인 제갈량이 들고 있는 부채는 곧 지혜의 상징이다. 이 부채는 제갈량의 부인 황월영이 신선 세계의 거위털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거위털 부채는 그렇게 제갈량의 보물이 됐고 소설 <삼국지> 이후로 사람들에게 ‘행운을 주는 물건’이 됐다.

부채는 예로부터 생활 건강의 필수품이었다. 우리 조상들이 단옷날 무렵 주고받는 선물로 인기가 높았다. 가혹한 여름의 시작 앞에서 서로 ‘더위를 무사히 견뎌 내자’는 도닥임의 마음이 담겨 있다. 무속의 관점에서는 부채의 맑은 바람이 악귀를 쫓아내는 벽사의 기능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다. 조선 시대 임금은 더운 여름 땀 흘리며 일하는 신하를 아끼는 마음에 부채를 하사하기도 했다. 우리 조상은 부채의 고정된 모양을 뛰어넘는 혁명을 일으킨 주인공이었다. 고려 시대에 접는 부채 곧 ‘접선(摺扇)’을 세계 최초로 만들었다. 대나무 껍질로 부챗살을 만든 ‘합죽선(合竹扇)’ 등 다른 이름이 많다.

부채는 더위를 식힐 뿐만 아니라 질환 예방에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햇빛을 가리거나 비를 막고, 야외에서 깔고 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부채는 기본적으로 실용적인 도구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의 풍류는 그것을 독특한 문화로서 품는다. 판소리 같은 음악이나 고전 문학 등 예술 분야에 빠지지 않는 소재가 부채다. 부채춤은 한국을 대표하는 무용이요, 부채 그림은 부채 미학의 정수다. 중국·일본과는 다른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한국 건축물에도 부채의 미학이 스며 있다. 한옥의 처마 끝 추녀, 그 비상하는 듯한 부드러운 곡선은 모두 부챗살을 닮은 것이다.

오는 25일 단옷날을 앞두고 한 지인으로부터 합죽선을 선물 받았다. 시원하게 펼쳐 보니 평생 새겨들을 귀한 삶의 경구가 종이에 적혀 있다. 손수 먹을 갈아 남몰래 닦은 솜씨로 한 자 한 자 정성껏 찍어 올린 붓글씨다. 그는 부채 제작 전문가도 아니요, 서예 분야에 종사하는 예술가도 아니다. 하지만 그 진정성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아직도 이런 운치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부채 하나에 여름 내내 무더위를 이겨 낼 힘을 얻는 건 신비한 경험이다. 신체의 건강과 정신적 아름다움까지 간직한 부채. 삶의 템포를 두어 박자 늦춰 보는 이 아날로그의 운치를 안다면, 분명 세상은 이전과 다르게 보일 것이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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