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코로나19의 나비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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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익 디지털콘텐츠팀장

2018년 한여름. 미국인 친구들이 필자의 집에 머물며 즐겁게 저녁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딩동댕~. 아, 아. 관리사무소에서 알려드립니다. 이웃을 위해 새벽이나 밤늦게 청소기를 돌리거나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는….” 순간, 그들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눈을 커다랗게 떴다. 한국을 찾기 전 ‘북한 리스크’를 우려했던 터에 무슨 공습 경보 같은 게 아닐까 염려하는 눈치였다. 아파트 공지라고 설명했더니, “그럼 소리를 끄거나 조절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고층 아파트가 빽빽한 수천 세대 아파트도 낯설지만, 군대나 회사에서나 있을 법한 방송을 집에서 듣는 것 자체가 문화 충격이었던 것이다.

공동체 지향 강한 대한민국
코로나19로 전체주의화 ‘클릭’
디지털 K-방역 세계적 찬사 속
헌법 보장 기본권 잊지 않아야

아파트에 살면서 안내방송을 ‘비정상’으로 여겼던 적이 없었다. 시끄럽고 성가시긴 했지만, 마을 이장님의 정겨운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울리던 문화가 남아서 그렇겠거니 여겼다. 그 작은 소동 이후에도 계속된 안내방송은 사생활을 배려하지 않는 무지막지한 ‘강제 방송’이 됐다.

친구들이 돌아간 뒤 관리사무소에 전화해 “하루가 멀다하고 그렇게 방송을 해야 하나” 물었다. 정전, 지진 같은 위급한 내용만 방송하고 평소엔 문자메시지 같은 걸 활용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과 함께. 담당자는 ‘거 참 유별난 사람이네’라는 뉘앙스로 “현실적으로 힘들다”고 답했다. 이후 관리사무소는 디지털 업그레이드를 한다면서 더 비인간적인 ‘로보트 음성’을 내는 기계를 들였다. 아이들이 중요한 시험공부를 하든, 누군가 깊은 잠에 빠져 있든 말든 연일 방송을 하니, 영화 ‘아일랜드’ 속 복제인간들처럼 거대한 수용소에 갇혀 사는 기분이 든다. 최근 어느 SNS 논객의 비슷한 문제 제기를 목격하고 필자만 ‘유별난 사람’이 아니란 반가움마저 일었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너나 할 것 없이 직장, 아파트 등 소속 집단에서 ‘1호 코로나 환자’로 찍히지 않아야 한다고 노심초사하는 세상이 됐다. 부주의한 사람으로 찍히는 동시에 동선 공개로 사생활까지 ‘탈탈’ 털릴 게 뻔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민의 절반 이상은 아파트에 산다. 아랫집이 저녁으로 뭘 먹는지 냄새로 알아채고 엘리베이터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 다닥다닥 붙을 수밖에 없는 구조물 속 도시인들은 4차산업혁명을 앞세운 ‘디지털 전체주의화’에 둔감할 수밖에 없다. 모두의 안전을 위해 QR코드를 찍고 사생활을 공개하는 게 당연한 일처럼 여겨지지만, 극심한 코로나19 피해를 겪고 있으면서도 이를 경계하는 타국의 모습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포스트 코로나19’가 화두로 떠오르자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 등 여러 석학들이 국가의 ‘빅브라더 전체주의화’가 더욱 강화되고 앞당겨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CCTV 출연과 개인·위치정보 제공에 ‘동의함’을 누르는, 대체 가능한 자신이 당연한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몇년 전 어느 미국 학교를 방문했을 때 목격한 장면을 잊을 수 없다. 학교 행사장에서 아이들이 짝다리를 짚고 제 멋대로 서도, 심지어는 춤을 추고 있어도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다만 매너 없는 행동을 하거나 질서를 지켜야 할 장면에선 아주 엄격하게 아이들을 교육했다. 반면 대한민국 학교에선 일제가 남긴 ‘군사문화’가 아직도 아이들을 억누른다. 아이가 초등학교 때 운동장에서 얼차려를 받고 ‘축구골대 선착순’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참담함이란.

최근 공개된 전설적인 미국 프로농구팀 시카고 불스의 다큐멘터리 ‘더 라스트 댄스’에는 인상적인 장면 하나가 나온다. 챔피언 결정전 기간에 훈련장을 이탈했다가 경기 직전 돌아온 ‘코트의 악동’ 데니스 로드먼. 필 잭슨 감독과 마이클 조던은 그를 그냥 내버려 둔다. 그것이 그의 유일한 재충전 방식임을 알았던 것이다. 전체주의 성향이 강한 대한민국에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이쯤에서 학창 시절 암기만 했던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지니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 국가로부터 개인의 자유로운 생활을 간섭받지 않을 권리. 성별, 종교, 사회적 신분 등에 의해 불합리한 차별을 받지 않을 권리까지. 이 모든 권리는 당연히 자신의 의무를 다할 때 누릴 수 있고, 국가 안전 보장과 질서 유지, 공공복리를 위해 법률로 제한될 수 있다. 그렇지만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핵심까지 국가가 침해할 수 없다.

조지 오웰의 <1984>, 로이스 로우리의 <기억전달자>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공동체주의가 가진 장점은 살리면서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최대한 보호하는 그런 우리 사회의 ‘라스트 댄스’를 꿈꾸는 건 정말 비현실적인 일일까.

ru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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