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수의 소설과 세상] 전쟁 기획자 그리고 역사의 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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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밀다원시대 문학축제 운영위원장

6·25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이 지났다. 포화로 폐허가 되고 피로 붉게 물들었던 산하는 수목이 우거진 산야로 바뀌었고 도무지 전쟁의 상흔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 해맑은 6월의 태양 아래 고즈넉한 평화처럼 짙은 녹음이 드리우고 있다. 그렇지만 전쟁은 아주 끝난 게 아니다. 북한 정권의 위협과 도발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전쟁으로 참화를 입은 이들의 상처도 아직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3년간의 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막심한 인명 피해와 물적 손실을 가져왔다. <북한 30년사>에 의하면, 남북한 통틀어 약 520만 명의 인적 손실을 보았다고 한다. 군인 전사자, 부상자, 실종자, 그리고 비전투요원인 민간인 피학살자, 사망자, 부상자, 납북자, 행불자를 모두 합한 숫자이다. 그때 남북한 총인구가 3000여만 명이었다고 추정할 때, 6명 중 1명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직접적으로 희생된 셈이다. 특히 일반인의 인적 손실이 340여만 명에 이른다는 것은 전 세계 전쟁 역사상 그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라고 한다. 6·25가 얼마나 비참한 전쟁이었는지를 여실히 말해준다.

6·25전쟁 70년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
아무리 신성한 이름으로 포장한다 해도
전쟁은 희생자들에게 폭력이자 야만일 뿐
전쟁 기획자 역사의 법정에 세워 단죄를

민족해방이라는 허울 좋은 미명으로 시작된 전쟁은 1000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을 양산했다. 한국방송공사에서 1983년 6월 30일부터 무려 138일에 걸쳐 진행한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을 선명히 기억한다.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감동의 현장에서 무려 1만 189명의 이산가족이 서로 만날 수 있었다. 이어 1985년 남북 적십자사 간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처음으로 이뤄진 이후로 2018년까지 총 21차례 성사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극소수 가족에만 한정되었다는 점에서 상봉 기회를 가지지 못한 이산가족들의 아쉬움은 큰 것이었다. 필자의 부모도 생전에 여러 번 신청서를 제출했으나 기회를 얻지 못했다. 사사로운 이야기지만, 선친은 말년에 자식도 알아보지 못하는 치매를 앓았다. 그런데 문병 온 사람마다 붙잡고 돈 1000원만 달라고 애원하는 이상한 증세를 보였다. 이유인즉슨, 고향 갈 차비로 쓸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고향에 가면 돈이 많으니 다 갚아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함경남도 원산이 고향이건만 선친은 끝내 그 땅을 다시 밟지 못한 채 한 많은 상처를 자식들에게 유산처럼 남기고 부산에서 별세했다.

마하트마 간디는 전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광기 어린 파괴가 전체주의 이름으로 일어났든, 자유나 민주주의와 같은 신성한 이름으로 일어났든, 죽은 이나 고아, 집 잃은 자에게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해도 전쟁은 그저 희생자들에겐 잔인한 폭력이자 무모한 야만에 불과하다는 뜻일 것이다. 더군다나 극한 상황의 최전선에서 전투를 수행한 병사들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 그들에게 충성스러운 애국심과 이념으로 똘똘 뭉친 보편적 군인상을 기대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이는 어쩌면 가장 비인간적인 희망이나 요구일는지 모른다.

6·25전쟁 70주년이 되는 이 지점에서 전쟁의 본질과 그 허구성을 간명하게 그려 낸 에리히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를 다시 꺼내게 된다. 1929년 독일에서 발간된 이 작품은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르포 형식의 반전소설이다. 주인공 파울 보이머는 고등학교 담임 교사의 선전 선동으로 발동된 영웅 심리에 휩쓸려 친구들과 함께 특별지원병이 된다. 간단한 훈련을 마치고 그들이 배치된 곳은 최전방인 서부전선이다. 날마다 포화가 빗발치는 전장에서 친구들은 하나둘씩 쓰러지고,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도 혼미한 가운데 그들은 차츰 가혹하고도 비정한 전쟁의 부조리를 깨닫게 된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보이머는 종전이 가까운 어느 날 상대 진지에서 날아온 총탄에 맞아 전사함으로써 그의 수기는 끝이 난다. 그러나 별다른 전황 변화가 없는 사령부 보고서엔 그저 ‘서부전선 이상 없다’라고 기록될 뿐이다. 레마르크는 이 소설에서 한 병사의 눈으로 전쟁의 허구성과 상대성 그리고 끔찍한 비인간성을 고발하고 있다. 전선에서 그들이 나누는 순진한 대화가 오히려 전쟁의 본질을 간명하게 드러낸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수들이며 목사들이며 신문들은 우리만 옳다고 말하잖아. 그건 뭐 그렇다고 해두자. 그런데 프랑스의 교수들이나 목사들이나 신문들도 자기들만이 옳다고 주장하겠지? 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

6·25전쟁으로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거나 불구가 됐다. 그러나 정작 전쟁 기획자인 김일성과 그 추종 무리는 대부분 영웅 칭호를 받으며 제 명대로 살다가 갔다. 우리는 그들을 진실에 입각한 역사적 법정에 세워 단죄하고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만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고 또 몇몇 인간들로 비롯되는 야만적 폭력의 준동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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