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나라의 백성’으로서 더 외롭게 투쟁하는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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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문 ‘사상으로서의 조선적’ 번역

<사상으로서의 조선적>과 이를 번역한 문학평론가 정기문. 정기문 제공

부산의 젊은 문학 평론가 정기문(39)이 <사상으로서의 조선적>(나카무라 일성 지음, 보고사)이라는 번역서를 냈다. ‘조선적(朝鮮籍)’은 일제강점기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후예들이 지닌 ‘옛 조선 국적’이다. 정기문의 설명이다. “그들은 사죄하지 않는 일본과 남북으로 찢긴 한반도의 분단 체제에 맞서 ‘없는 나라의 백성들’로서 무국적을 그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지적 태도를 사상이라 부르는 겁니다.”

책 내용은 ‘조선적’을 견지하며 경계선에서 살아온 여섯 명, 고사명 박종명 정인 박정혜 이실근 김석범에 대한 인터뷰 르포다. 문학자 교육가 운동가인 이들은 1925~1942년생으로 1940년대 후반~1950년대에 청년기를 보냈다.

사죄 않는 일본과 분단 체제에 맞서
무국적 견지한 ‘옛 조선 국적자’ 사연
경계선에서 살아온 6명의 삶 담아





그는 이 책을 번역한 이유를 “현재의 저 자신과 한국을 성찰하기 위해선 식민지 시기를 반드시 경유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식민지 시기’는 참으로 복잡하고 중층적인 문제를 남겼다. 예컨대 정기문의 경우, 초등학교 입학 전 북한과 일본을 구분하지 못했다고 한다. 둘 다 그냥 ‘나쁜 나라’였다. 하지만 가족사의 역사적 상흔을 알게 되면서 문제의 근원이 식민지 시기, 즉 단순화하면 ‘일본’에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식민지 시기에 일본서 태어나 ‘조센징’으로 차별 받다가 해방 후 한국말도 모른 채 귀환했어요. 할아버지는 한국전쟁에 징병 돼 돌아가셨는데 유해조차 찾지 못했습니다. 저희 일가는 그때 창녕서 피란 와서 부산에 정착했어요. 한국전쟁과 분단이 뭡니까. 식민 지배로 촉발된 것이잖습니까.” 이 식민 지배의 상흔, 잔재, 분열을 관통하고 넘어서야 된다는 것이다.

그는 “자이니치 문학자들은 여전히 식민주의를 살아가는 이들”이라고 했다. 그중 ‘조선적’은 자이니치(재일 교포) 중에서도 더 외로운 투쟁을 하는 이들이다. 세부적으로 ‘조선적’도 중층적이다. “남과 북에 속하지 않는 ‘조선적’은 문제 제기다. 나는 통일 조국을 요구한다”라는 <화산도>의 작가 김석범 같은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조선적’ 중 북한 국적자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20세기적 이데올로기 쟁투가 벌어지던 해방 이후의 상당 기간, 해외에서 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한 나라는 북한처럼 여겨지기도 했던 것이다.

자이니치와 조선적은 간단한 단어가 아니다. 그들은 조선인이면서 황국신민이라는 ‘분열된 자아’를 지녔으며 한국말을 못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도 일제강점기에 ‘냄새 나는 조센징’이라며 인간 이하의 극심한 차별을 받았으며 일본 패전 후 헌신짝처럼 내팽개쳐졌다. 심지어 일본 공산주의 운동에서는 총알받이처럼 활용된 경우도 있다. 이 복잡한 내막을 넘어설 수 있는 전망이, 김석범의 한 마디 “통일 조국”에 있는 것이다.

부산에는 자이니치 문학에 대한 관심의 흐름이 있다. 계간 <오늘의문예비평> <신생> 등이 관련 기획을 했고 문학 평론가들로 부산대의 이재봉 손남훈, 동의대 하상일 교수 등이 저서와 글을 생산했다. 요산문학축전에서는 디아스포라의 문제를 다루면서 자이니치 문학을 조명하기도 했다. 정기문의 이번 번역서는 이런 흐름과 자장 속에 놓여 있다.

정기문은 “‘조선적’의 삶은 지금 여기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또한 우리는 어떤 세계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요청한다”고 말했다. 거기에 역사와 문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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