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당신이 삶의 주인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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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 문화부 문학종교팀장

몇 달 전 김자미 아동문학가를 통해 할머니들이 쓴 인생 그림책을 접했다. 그림책의 주인공은 수십 년째 부산 사하구 감천문화마을에서 살아온 70~80대 할머니 여섯 분이었다. 할머니들의 이름은 곽은희, 강길순, 신면용, 김정식, 임명옥, 황계순.

<감천문화마을 할머니 인생 그림책>(해성)’에는 할머니들의 고단했던 삶에 스며들었던 슬픔, 고통, 행복이 선연하게 담겨 있었다. 남편이 세상을 빨리 떠나 자녀 셋을 먹여 살리기 위해 김밥을 팔러 나갔던 황계순 할머니. 김밥이 하나도 팔리지 않는 날도 많았다. 실의에 빠진 할머니는 김밥 통을 머리에 인 채로 빠져 죽으려고 자갈치 바닷가를 여러 번 갔다. 하지만 할머니는 ‘새끼들 얼굴이 아른거려’ 그 순간을 견뎠다.

힘겨운 세월 묵묵히 견뎌야 했던
어르신들의 자서전 출간 활발

부산 작가들 스토리텔링 작업 결실
지역 미시사 풍성하게 하는 시도

할머니들의 사연은 저마다 구구절절했다. 스무 번이나 이사하면서도 객식구를 늘 달고 살아야 했던 이야기, 무시무시했던 한국전쟁의 참상과 이산가족 상봉의 극적인 순간에 대한 회상, 아버지 초상에 아이를 혼자 낳고 탯줄을 끊었던 긴박한 순간….

6권의 시리즈로 구성된 <감천마을 할머니 인생 그림책>은 부산문화재단의 ‘맞춤형실버문화 복지지원사업’의 일환으로 발간됐다. 감천문화마을의 창작공간 반딧불이 3호점 입주작가인 김자미 아동문학가가 그림책 시리즈를 기획·진행했다. 김 작가는 할머니들의 구술을 녹음해 글로 옮겼고, 할머니들이 직접 그린 그림을 함께 실어 책으로 펴냈다.

최근 부산지역 작가들이 격변의 현대사를 묵묵히 살아온 우리 주변 어르신들의 드라마틱한 인생을 스토리텔링화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작가들은 어르신들을 인터뷰하거나 글쓰기 프로그램 등을 진행한 뒤 어르신들의 자서전과 인생 그림책을 잇따라 펴냈다. 어르신들의 인생 스토리는 지역 미시사를 풍성하게 하는 소중한 문화적 자원이다.

김여나 동화작가는 지난달 <기장군 최고령 출향 1세대 해녀 김복례 자서전>을 펴냈다. 김복례 할머니가 고향 제주를 떠나 부산 기장군에 정착하는 과정과 정착 이후 삶을 기록한 것이다. 할머니는 남편과 헤어진 뒤 물질을 하며 자녀를 키워냈다. 특히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병약해 할머니 속을 태웠다. 할머니는 뭍에서 아들 병을 고치기 위해 1950년대 말 제주도를 떠나 기장군 기장읍 연화리 신암마을에 정착했다. 78세까지 물질을 한 할머니는 ‘해녀 스승’으로 통한다.

할머니가 김여나 작가와 자서전을 위한 인터뷰를 하며 한 말이 감동적이다. “꽃다운 나이에 고향을 떠나와 평생 신암마을에 뿌리를 내리고 해녀의 스승으로 살았지만, 그 세월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어. 이제라도 늙은이를 찾아줘서 살아온 세월이 자랑스러워.”

김 작가는 <기장군보>에 ‘기장의 18개 갯마을과 해녀’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다. 그는 해녀들을 취재하기 위해 신암마을을 찾았다가 출향 1세대 해녀 김복례 할머니를 만나게 됐다. 김 작가는 “글만 쓸 줄 알면 살아온 인생을 책으로 쓰고 싶다”는 김 할머니의 말을 듣고 뜻을 세워 자서전을 썼다. 김 할머니에게 자서전을 선물해드린다는 취지에서 황현일 <기장군보> 편집장과 사비로 자서전을 제작했다. 출향 1세대 해녀의 첫 자서전이 바다를 지키며 갯마을을 살리는 일꾼이었던 기장 해녀의 뿌리를 찾고 문화, 역사를 잇는 마중물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깡깡이예술마을사업단이 지난해 펴낸 <부끄러버서 할 말도 없는데>(도서출판 호밀밭)는 ‘근대수리조선 1번지’ 부산 영도구 대평동 깡깡이마을 어르신들의 삶의 주름과 애환을 담은 이야기였다. 깡깡이마을에서 평생을 보낸 김길자, 김부연, 김순연, 박송엽, 서만선, 조창래 씨 등 6명의 어르신이 주인공이다. 책은 깡깡이예술마을사업단이 2017~2018년 2년간 진행한 시화동아리, 자서전동아리 프로그램의 결과물이다. 자서전동아리는 정우련 소설가가, 시화동아리는 이민아 시인과 전영주 미술 작가가 각각 진행했다.

책에는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술을 사주고 빈 봉투만 가지고 돌아오던 남편 이야기, 대평동에 식당을 열어 선원들에게 음식을 제공했지만, 배가 침몰해 밥값 200만 원을 받지 못한 사연 등 담겼다. 맞춤법이 맞지 않는 문장, 삐뚤삐뚤한 글자 속에서 어르신들의 신산한 삶의 풍경을 엿볼 수 있었다. 서만선 할머니는 “내가 걸어온 발자국 계단을 말없이 뒤돌아보니 한스럽고 대단했다”고 말한다.

꼭 위인이 아니더라도 어르신들의 치열했던 삶 또한 위대하다. 이분들을 보니 문뜩 이 생각이 든다. “당신이 삶의 주인공입니다.”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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