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다시 떠올리는 ‘슬픈 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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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국 부국장 겸 편집부장

“인종적 불평등과 대통령의 흑인 차별 언행이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와 신념을 짓밟았다. 나는 양심에 따라 국무부 차관보에서 사직한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 출범 때부터 함께한 메리 엘리자베스 테일러 입법 담당 차관보가 최근 사표를 제출했다. 올해 서른 살인 테일러 차관보는 국무부 입법 담당 차관보 자리에 오른 최연소, 최초의 흑인 여성이었다. 지난 5월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의 가혹 행위로 사망한 이후 미국 전역에서 인종차별 규탄 시위가 이어지고 있지만, 그들을 무법한 폭도로 규정하고 강경진압을 천명한 트럼프 대통령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사직서를 던진 것이다.

코로나19 사태와 장기불황은 그늘진 미국 사회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 준다. 사회가 혼란스러울수록 인종차별과 갈등은 더 크게 불거져 나왔다. 다민족, 이민자의 나라로 불리는 미국 인구 약 3억 3000만 명 중 백인 비율은 61%, 흑인과 아프리카계가 13.5%, 히스패닉이 18% 정도이고 아시아인은 5.8% 정도다. 굳건한 백인 주류사회가 ‘1등 국민’이고 나머지는 ‘2등 국민’이라는 차별의 골짜기는 생각보다 깊다. 유럽도 마찬가지다. 산업화를 먼저 경험하고 현대적 제도를 만든 백인(서구인)들의 우월의식이 인종차별 갈등을 만들어 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미국 등 인종차별 반대 운동
코로나와 함께 계속 이어져

인종차별은 우월주의가 출발점
근거 없는 편견은 갈등만 키워

‘함께 잘 사는 세상’ 위해
우리 곁의 차별도 바로잡아야


‘통제 불능’사태로 치닫는 미국의 코로나19 감염 사망자가 13만 명을 넘어섰다. 그중에서도 흑인 사망자 비율은 백인보다 몇 배나 더 높다. 백인들보다 상대적으로 가난한 흑인 10명 중 6명이 비만과 당뇨병 등 기저질환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미국에서는 피부색이 짙을수록 코로나19 감염에 내몰린다는 말이 있다. 흑인 등 비백인계의 열악한 직장 환경과 주거환경이 부른 ‘건강 불평등’의 단면을 보여 준다.

한 보도에 따르면 ‘코로나19로 인한 미국 내 인종 간 사망자 차이는 인종차별의 결과이며, 인종차별주의가 비백인계 사람들을 바이러스와 질병에 더 많이 노출되고, 더 소홀하게 보호받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편견과 불평등의 대물림이 가져다 준 뼈아픈 현실이다. 미국의 코로나19 재앙은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구분을 더욱 확실하게 만들었다.

인종이라는 말은 자연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생물학적 특성에 따른 구분이다. 그러나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열강들은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인종적 우월주의를 내세웠다. 백인(서구인)은 본래 ‘고귀한 품성을 가진 문명적 인종이며, 다른 인종(특히 흑인)은 무능하다’는 편견과 오만으로 약소국을 약탈하며 식민지로 삼았다. 그들에게 ‘인종’이라는 단어는 우열을 나누는 잣대였다.

구조주의 인류학의 창시자 레비스트로스는 그의 저서 <슬픈 열대>에서 이와 같은 서구 백인들의 근거 없는 우월주의와 인종차별을 비난했다. 그는 그릇된 관념으로 백인들의 생각을 지배해 온 ‘문명’과 ‘야만’의 개념을 엄중하게 비판했다. 또한 서구 사회가 다른 사회에 대해 그들의 가치 기준을 맘대로 부여하는 오만한 행동도 힐책했다. 레비스트로스의 말에 따르면 “서로 다른 사회만 존재할 뿐, 이 세상 어디에도 ‘우월한 사회’는 없다”는 것이다. 생물학적 구분에서도 ‘우월한 인종’은 없다.

편견과 차별의 출발점은 내가 타인보다 낫다는 우월주의다. 종교나 사상, 제도가 비백인계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백인 사회의 오래된 편견부터 없어져야 흑백 차별도 사라질 수 있다. 인간은 단일한 종에 속하며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미국 첫 흑인계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의 부인 미셸도 “분노가 모이면 역사를 바꿀 수 있다. 이번 일은 수십 년간 방치된 불평등과 편견 때문”이라며 조지 플로이드 사망으로 촉발된 인종차별 반대 운동에 동참을 호소했다. 미국에서 시작된 인종차별 반대 시위는 유럽까지 번졌다. 영국의 런던 의회 광장에 세워진 처칠 동상도 수난을 겪었다. ‘숨을 쉴 수가 없다’ ‘흑인의 삶도 중요하다’는 문구는 흑인 인권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흑인들의 인종차별 반대 운동을 보면서 ‘우리 곁의 차별’도 바로잡아야 할 시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생활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겪는 편견과 차별은 우리 사회에서 어떤 모습일까? 우리 스스로는 다양성과 차이를 얼마만큼 인정하며 배려하고 있을까? 그들 보다 조금 잘 산다는 이유로 불평등을 강요하며 저급한 우월주의를 내세우지는 않았을까…?

인류 보편적 가치는 ‘함께 사는 세상’에 있다. 그것은 인간 존중에서 시작된다고 배웠다. ‘흑인의 삶도 중요하다’ ‘아시아인의 삶도 중요하다’ ‘우리 모두의 삶도 중요하다’ 우월주의와 편견은 오만을 키우고 오만은 갈등과 분노를 부를 뿐이다. bk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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