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삼동 패총과 반구대 암각화, 사슴 그림 토기로 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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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수 전 임시수도기념관장

공직을 마무리하면서 <신석기시대 고고학>을 낸 하인수 전 임시수도기념관장. 오른쪽 위는 동삼동 패총 사슴 그림 토기. 김경현 기자 view@

하인수(60) 전 임시수도기념관장이 지난달로 공직을 마무리하면서 560쪽의 <신석기시대 고고학>(진인진)을 출간했다. 1989년 부산박물관에 몸담은 이래 31년, 부산대 박물관 학예직으로 시작한 1986년부터 치면 34년이다. 이래저래 따지면 부산박물관 학예직 중에서 ‘퇴임 1호’다.

18편 글이 실린 <신석기시대 고고학>은 1부 사회문화론(11편), 2부 토기론(7편)으로 이뤄져 신석기 시대 연구 지평을 개척한 그의 성과를 녹록지 않게 담았다. 그는 한반도 남부 신석기 시대 연구의 권위자다. 그에 따르면 한반도 남부 신석기 시대는 1만 년간(기원전 1만 2000~2000년)이며, 6개 시기(초창기-조기-전기-중기-후기-말기)로 나뉜다. 그중 2번째인 조기, 즉 기원전 6000년 이후 신석기 시대는 줄곧 해양을 생업 기반으로 삼은 '해양문화시대’였다. 신석기 시대 해양문화의 중심지가 부산이었다. 부산과 해양은 이렇게 깊은 관계다.

31년 공직 생활 지난달 마무리
부산박물관 학예직 ‘퇴임 1호’
연구집 ‘신석기시대 고고학’ 출간
직접 발굴한 동삼동 패총도 소개 



특히 중기는 조·기장을 생산하는 잡곡 농경의 유입으로 매우 역동적이며 한 단계 진전된 시기였다. 이때 기존 ‘단순수렵채집사회’는 잉여 생산물을 산출하는 ‘복합수렵채집사회’로 나아갔다. 하인수 전 관장은 “이런 변화를 다 보여 주는 한반도 신석기 문화의 대표 유적이 부산 동삼동 패총”이라고 했다. 그는 이 패총을 직접 발굴했다. 동삼동 패총은 4000년(기원전 6000~2000년)의 시간을 집적하고 있다.

-신석기 시대 중기가 그렇게 획기적이었으며 중요한가?

“중기는 기원전 3500~2700년까지 대략 800년 정도로 설정할 수 있어요. 한반도 중서부 지방(암사동식 토기 문화)에서 내려온 잡곡 농경이 토착 수렵·어로의 생업 체계(영선동식 토기 문화)에 더해져 대단히 커다란 사회 구조적인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습니다. 이때 동삼동 패총 집단은 남해안 지역을 대표하는 거점 집단이었지요.”

-동삼동 집단이 어떻게 남해안 지역을 대표했다는 건가?

“예를 들면, 동삼동은 신석기 중기 최고 장신구인 명품 조개 팔찌의 생산·수출 단지로 한·일 교역의 중심지였어요. 조개 팔찌는 전국 곳곳의 36개 패총에선 각각 1~28점밖에 나오지 않았으나, 동삼동에선 무려 1500점 넘게 출토됐습니다. 압도적입니다. 중기 ‘복합수렵채집사회’ 단계의 동삼동에는 조개 팔찌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집단이 있었다는 말이죠. 그 조개 팔찌는 한반도 다른 지역, 서해안과 내륙은 물론 일본 대마도와 규슈에까지 수출됐던 겁니다. 일본에선 날카로운 도구를 만드는 흑요석이 들어왔죠.”

부산·경남 남해안과 일본 대마도·규슈의 교역망은 지리적 숙명이고 필연이었다. 하 전 관장은 “신석기 시대 한·일 교류 관련 유적은 일본 25곳, 한국 17곳”이라며 “한국은 동·남해안에 밀집해 있으나, 심지어 제주도 흑산도까지 포함돼 있고 일본은 서북 규슈 해안과 대마도 서안에 집중해 있다”고 했다.

그가 기적적으로 확인한 게 신석기 중기인 기원전 3000년의 동삼동 패총 사슴 그림 토기였다. 이 토기 조각은 300개 유물 상자 속에 꼭꼭 숨어 있다가 발굴된 지 4년 만에 확인됐다. 그리고 ‘역사’를 바꿨다.

-동삼동패총 사슴 그림이 어떻게 역사를 바꾸었다는 말인가?

“울산 반구대 암각화 제작 시기를 기존 청동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 바꿨지요. 반구대 사슴과 동삼동 사슴은 그림 양식상 동일합니다. ‘반구대 청동기시대설’의 근거는 신석기 시대 고래잡이 불가론이었어요. 반구대 암각화에 고래잡이 그림이 있잖아요. 그런데 동삼동 패총 조기~말기 신석기 문화층에서 다양한 고래 뼈들이 대량 출토된 겁니다. 결국 동삼동 패총의 증거들이 ‘반구대 신석기시대설’을 뒷받침한 거죠.”

하 전 관장은 “신석기 시대 사회상은 점차 풍부하고 새롭게 드러나고 있다”고 했다. 신석기 시대 조기(기원전 6000~4500년)에 중국 동북지역 문화의 영향을 받은 옥 귀걸이(결상이식) 문화가 있었다. 신석기 시대 전기(기원전 4500~3500년)에는 해안 산상(山上)에 제의 유적도 있었다. 부산 다대동 봉화산 유적, 이길 봉수대 유적, 녹산동 세산 유적이 그것이다. 이 사실들은 그가 처음 학계에 보고한 것이다.



신석기 시대 연구자이자 부산대 박사 출신인 그는 복천박물관장과 부산근대역사관장을 역임했고, 한국신석기학회장을 거쳐 현재는 부산고고학회장이다. 그는 문화 교류에서 ‘재지주의(在地主義)’ 입장을 많이 취하고 있다. 신석기 조기를 대표하는 남해안 융기문토기의 문화 계통에서도 재지주의 견해를 취한다. 언제부터인가 그럴듯한 프로필을 갖춘 외부 인사들이 부산박물관 수장을 맡아 왔다. 그리고 임기를 채우고 가 버렸다. 문화계의 자생적 발전과 재지주의를 깡그리 무시하는 이런 후진적 발상과 풍토를 제발 바꿔야 한다고 그는 아쉬운 토로를 한창 이어 갔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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