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안전·평등 우선하는 ‘새로운 표준’ 만들어야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코로나 시대가 던지는 질문] 하. 돌아갈 수 없다면

부산시교육청 소속 14개 공공도서관이 ‘생활 속 거리 두기’ 방침에 따라 자료실과 열람실 좌석 수를 3분의 1로 축소해 운영하고 있다. 오른쪽은 구직자들이 실업급여 설명회장에 들어가기 위해 줄 서서 기다리는 모습. 정종회 기자 jjh@·연합뉴스

코로나19 이전의 세계(BC, Before COVID-19)는 다시 오지 않는다.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되더라도 근절은 어렵고, 종식되더라도 새로운 감염병이 더 짧은 주기로 나타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정상화’를 기다릴 게 아니라 새로운 ‘정상’을 만들어 나가야 할 때다.



‘안전 없이는 효율 불가능’ 확인
노동법 사각지대 해소 필수적
불확실 시대 ‘심리 방역’ 제공
혐오 넘어 ‘차별 없는 평등’을



■새로운 사회를 설계해야

정부의 생활방역 제1수칙 ‘아프면 쉰다’는 재난안전문자 속에만 존재한다. 우리나라 근로기준법에는 병가제도가 없다. OECD 36개 회원국 중 상병수당 제도가 없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미국뿐이다. 국내에서 유급병가를 보장하는 기업은 2018년 기준 7.3%에 불과하다.

법률사무소 소통의 유선경 공인노무사는 “무급휴직에 동의하지 않으면 사직서를 쓸 것을 강요받는 상담 사례들이 발생했다”면서 “근로기준법상 연차휴가조차 보장되지 않는 4인 이하 사업장의 노동자와 고용보험이 안 돼 실업급여를 받지 못하는 65세 이상 고령 노동자 등 정부의 지원이나 노동법의 사각지대에 있는 노동자에 대한 안전망 확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코로나19는 특히 근무 환경과 일하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요구하고 있다. 서울 구로구 콜센터나 경기 부천 쿠팡 물류센터에서는 다닥다닥 붙어 있는 밀집된 사무실이나 강도 높은 장시간 근무 형태가 집단감염이 확산한 원인으로 지목됐다. ‘통제’와 ‘효율’을 중시하는 업무 관리가 노동자의 건강을 지키지 못한다면 생산성 차원에서조차 더 이상 유효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소프트웨어 개발업체 YH데이터베이스 부산사무소는 올 4월 코로나19 유행으로 인한 재택근무를 끝내고 곧이어 주 4.5일제 시범근무를 시작했다. 평균 연령대 30대 중반, 전원 여성인 직원들은 캠핑이나 공방 같은 취미 생활을 늘렸고, 일의 효율은 오히려 높아졌다. 홍은숙 팀장은 “불과 0.5일 차이이지만 심리적 부담이 줄면서 일에 대한 태도도 긍정적으로 바뀌었다”고 전했다.

사업장뿐 아니라 도시 계획도 ‘거리 두기’를 중심에 둔 전환이 요구된다. 부산연구원은 최근 낸 보고서에서 중세 유럽에서 페스트 이후 나타난 별 모양 요새도시 ‘팔마노바’를 예로 들면서 공원 녹지를 확충해 도시 공간 밀도를 줄이는 ‘비우는 도시’를 새로운 도시 모델로 제안했다. 비대면 생활방식에 대응해 도심 생활물류센터를 새로운 SOC로 확충하고 택배 노동자의 처우와 작업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혐오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코로나19는 우리 국민의 심리에도 영향을 미쳤다. 정부도 ‘심리방역’을 강조하면서 각종 지침들을 내놓았다. 부산시도 광역 센터와 15개 기초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코로나19 관련 심리상담을 진행했는데, 2월 13일부터 7월 1일까지 전화 상담 1만 3914건, 대면 상담 3172건과 문자 안내 등 정보 제공 3만 5652건이 진행됐다. 부산정신건강복지센터에 따르면 전체 센터 상담 건수도 전년 대비 배 이상 늘었다.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의 ‘감염병 심리사회방역지침’ 제작에 참여한 배정이 인제대 간호학과 교수는 “확진자는 자신으로 인해 가족이나 주위 사람, 직장에 피해를 끼치는 것에 대한 죄책감, 일반 국민들은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감과 함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한 우울감이 상상 이상으로 크다”면서 “혼자 고민하지 않고 이웃이, 지역사회가, 국가가 도움을 주고 지지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차별과 혐오에 대한 민감성이 높아진 것은 코로나19가 가져온 의외의 변화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최근 공개한 국민인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91.1%는 최근 코로나19 사태에서 ‘누군가를 혐오하는 시선·행위가 결국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는 생각을 해 봤다고 답했다.

국가인권위는 응답자의 88.5%가 차별금지 법제화에 찬성한다는 조사 결과를 토대로 지난달 30일 국회에 ‘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평등법)을 제정하라고 의견을 표명했다. 국회도 앞서 지난달 29일 관련 법안을 발의했다.

22개 인권단체로 구성된 코로나19 인권대응네트워크는 지난달 인권 관련 가이드라인 발표와 함께 “타인을 혐오하는 마음보다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때 우리는 더욱 안전할 수 있다”면서 “재난과 위기에 모두가 차별 없이 평등할 수 있는 준비를 이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혜규 기자 iwill@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