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시선] ‘제2 최숙현’ 막으려면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1등 지상주의’ 벗어나 체육 본래 가치 회복해야

체육시민연대 등 사회단체 대표들이 지난 6일 서울 국회 소통관에서 고(故) 최숙현 선수 사망사건 관련 기자회견을 열고 진상 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조정이 전부였던 ‘자연인’

2017년 12월 MBN의 교양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에 국가대표 조정 선수 출신 한 모(당시 47세) 씨의 사연이 나왔다. 그가 세간의 정을 끊고 산에 들어간 것은 겨우 마흔 살 때였다.

마라톤 다음으로 힘들다는 조정이다. 그만큼 많은 체력을 요하는 종목이라 가능한 이른 나이에 성과를 내야 했다. 한 씨는 ‘죽을 만큼’ 훈련해 국가대표로 성장,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을 따며 성공가도를 달렸다.

한 씨는 서른 살에 은퇴하고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수입은 선수 때보다 크게 줄었고, 제자들은 마음먹은 만큼 따라주지 못했다. 게다가 맡은 팀이 3년 내 일정한 성과가 없으면 사직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성적에 대한 부담과 그로 인해 제자들을 닦달해야 하는 생활, 그게 미칠 것만 같았다. 조정 이외 다른 일은 꿈에도 생각 못 했던 그의 마지막 선택지는 산이었다.

실업팀 선수 26.1% “신체폭력 경험”
엘리트 중심 성적 지상주의 이제 그만
누구나 함께 즐기는 교육의 장으로
체육 바라보는 사회 패러다임 바꿔야

■최숙현을 극단으로 몬 폭력









철인3종경기 여자 국가대표 출신 선수가 지난달 26일 스물 세 살 아까운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경주시청 소속이었다가 근래 부산시체육회로 옮긴 고(故) 최숙현 선수다. 경주시청 소속 시절 오랜 기간 감독, 선배, 팀닥터 등에게 상습적으로 폭력 등 가혹행위에 시달리다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최 선수가 남긴 녹취록과 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에게 가해진 가혹행위는 말 그대로 가혹했다. 욕설, 폭언, 협박, 폭행, 성희롱이 지속적으로 가해졌다. 폭행은 슬리퍼, 각목을 가리지 않고 수시로 행해졌다. 감독에게 알리지 않고 복숭아 한 개를 먹었다고 때리는 등 폭행의 이유도 가지가지였다. 체중감량을 못 했다고 사흘을 굶기고, 탄산음료를 주문했다는 이유로 20만 원어치의 빵을 사오게 해 토할 때까지 강제로 먹였다.



■최숙현은 살려 달라 했다

최 선수는 살기 위해 발버둥쳤다. 여러 군데 고충을 토로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와 관계된 대한철인3종협회, 대한체육회 스포츠인권센터에 진정서를 제출했지만 그를 위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한 곳은 없었다. 최 선수는 체육계 외에도 경주경찰서, 경주시청에도 피해 신고를 했지만 어느 곳도 그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스스로 삶을 마감하기 하루 전 최 선수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자신이 처한 상황을 낱낱이 전하는 진정을 넣었다. 하지만 이미 그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삶을 포기하는 비장한 심정이었던 듯하다.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넣은 뒤 그는 가족에게 ‘그 사람들 죄를 밝혀 줘’라는 마지막 메시지를 보냈다. 당시 그가 가졌을 고통과 분노, 체념이 절절히 묻어 있는 메시지였다.



■그만의 아픔이 아니었다

2004년 쇼트트랙 여자 대표팀 주축 선수 6명이 코치진의 상습적인 구타에 시달리다 선수촌을 집단 이탈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여자 쇼트트랙은 형제복지원이나 다름 없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이듬해 남자 쇼트트랙 대표 선수들이 비슷한 이유로 선수촌 입촌을 집단으로 거부해 논란이 됐다. 지난해 1월엔 쇼트트랙 심석희 선수와 유도선수 출신 신유용 씨가 코치로부터 상습 성폭행을 당했다고 각각 폭로해 공분을 일으켰다. 우리나라 체육계에서 폭력 등 가혹행위 피해자가 최 선수 혼자만이 아닌 것이다.

“대부분 선수들이 자기가 우울증인 걸 몰라요. 전 소속팀에서 자살시도를 해서 나왔어요. 감독과의 갈등 이후 두 번째 자살시도를 했거든요. 최근엔 1년 치 수면제를 받아서 다 복용하기도 했고요.”

국가인권위원회 스포츠인권특별조사단이 지난해 11월 21일 발표한 ‘실업팀 선수 인권실태조사 결과’에 실려 있는 어느 피해 선수의 응답이다. 총 1251명이 응답한 이 조사 결과를 보면 선수들은 ‘그냥 쓰고 버리는 물건’ 취급을 받았다. 성적을 못내면 “이년” “글러빠진 새끼”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들은 성인임에도 26.1%가 신체폭력을 경험했고, 8.2%는 거의 매일 맞았다. 성폭력 피해도 11.4%가 경험했다. 하지만 67.0%는 아무런 대처를 하지 못했다.



■헛구호에 그친 약속들

최 선수의 억울한 죽음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자 체육계와 정치권, 심지어 대통령까지 나서서 재발 방지를 위한 쇄신책을 주문하며 가해자 엄벌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공허하기만 하다. 심석희 선수의 성폭력 피해 폭로 이후 대한체육회 등은 선수와 지도자를 대상으로 전수조사를 실시한다는 등 대책을 쏟아 냈다. 정부도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한층 강화하고 민간 주도 특별 조사도 실시하는 등 칼을 빼 들었다. 하지만 최 선수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대한체육회는 체육계 인권침해를 없애겠다며 2016년 스포츠인권센터를 개편했지만 정작 최 선수의 호소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정부는 올 8월 스포츠윤리센터를 설립해 기존 스포츠인권센터까지 통합 운영키로 한다지만 얼마나 효과를 거둘지는 미지수다. 정치권도 여야 없이 진상조사에 나서는 한편 체육인복지법, 최숙현법 등 관련 대책 법안을 준비 중이라고 하지만 과거 심석희 사건 때도 비슷한 약속은 넘치고 또 넘쳤다. 이번 역시 한때의 소란에 그치지 않을지 의문이다.



■1등만이 내 세상

진상 규명과 가해자 엄벌, 나아가 충분한 체육인 인권 보호 시스템 마련은 꼭 이뤄져야 할 과제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나라 체육계에선 성적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 이른바 성과 지상주의다. 아무리 스포츠 정신 운운해도 1등이 아니면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 압박은 누구도 견디기 힘들다. 현역의 선수만이 아니라, ‘자연인’ 한 씨의 경우에서 보듯, 지도자에게도 마찬가지다.

최 선수가 소속했던 경주시청의 철인3종팀은 전국 최강이다. 팀을 최고로 이끈 선배 선수들의 언행은 그 자체로 절대적이다. 후배들은 선배의 말 한마디에 대꾸조차 할 수 없다.

감독 등 지도자는 지금 1등이라도 늘 불안하다. 최강의 자리를 유지해야 급여 등 그동안 받았던 대접을 계속 받을 수 있으니까. 폭력까지 수반하는 강압적인 지도 방식은 그래서 나온다. 그런 지도 방식을 따르지 못하는 선수는 팀에 해를 끼치는 존재로 퇴출된다. 지도자와 선수의 관계는 상명하복의 주종 관계로 흐를 수밖에 없게 된다.



■근본으로 돌아가야 산다

‘때려서라도 성적을 내야 한다’는 인식은 우리나라의 왜곡된 체육 역사에 기인한다. 박정희 정권은 1970년대 합숙훈련, 연금, 군 면제, 선수촌, 특기생 제도 등을 도입했다. 당시 북한보다 열세인 엘리트 체육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북한만은 이겨야 했다. 승리만이 최고라는 군사문화적 가치를 체육에 강요한 것이다. 전두환 정권에서 체육은 국민 건강의 문제가 아니라 국위 선양의 수단이 돼야 했다. 그래서 서울올림픽을 개최하고 프로스포츠를 적극 지원했다. 국가적 지원 아래 경기에선 반드시 승리해야 했고, 선수의 인권에 앞서 메달을 쟁취하는 데 전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체육계의 그런 관행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선수든 지도자든 성과 위주의 보상 대신 다른 방식의 보상을 고민해야 한다. 소수 엘리트만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국민 누구나 체육을 즐기고 그에 맞춰 지도자의 역할이 정립될 수 있는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7일 대통령이 중심이 돼 체육의 패러다임 전환을 이끌고 폭력적 환경을 변혁해줄 것을 권고했다. 만시지탄이나 맞는 말이다. 이제부터라도 차근차근 우리 내부에 음험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 왜곡된 인식을 걷어 내고 체육 본연의 가치로 돌아가야 한다. 임광명 위원 kmyim@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