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기억의 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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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희 편집국 디지털에디터

냉장고 안에 휴대전화를 두고 온종일 찾아 헤맨다는 주부 이야기는 자주 들어 아는데, 최근 유사한 일이 잦다.

세탁기를 냉장고라 부르고, 셋째 아이 이름을 불러야 하는데 첫째 둘째까지 호명하고서야 막내의 이름이 나온다. 노화로 인한 기억력 감퇴가 분명하다. 육체 노화는 20대가 넘어서면 시작된다는 학술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어 아주 부끄럽지는 않다. 반백 년 넘게 ‘빈티지’한 몸을 쓰고 있으니 그도 그럴만하다고 스스로 위로한다.

모바일 뉴스 세상 소환된 기록
누군가에겐 잊고 싶은 사실들
역사적 진실 반드시 규명해야

최근 디지털 부서로 몇 통의 이메일이 왔다. 거대 기관의 수장을 지낸 분인데 이전에 난 기사를 내려 달라는 요청서다. 대개 이런 요청서는 법률회사를 끼고 이루어진다. 법원 판결로 이러저러한 혐의가 해소되었으니 해당 기사를 고치거나 내려 달라는 이야기다. 성추행 내용도 있고, 횡령, 갑질 등등이 대부분이다. 당사자로서는 기억조차 하기 싫은 것임은 분명하다. 사람의 기억력은 유한하고 또 때로는 본인이 기억하고 싶은 것만, 즉 스스로 유리한 부분만 기억하는 것인데 이런 기사들이 제 이름 석 자를 입력하면 우수수 쏟아지는 모바일 디지털 뉴스 세상이 미운 사람이 많다.

뉴스의 대세로 점점 힘을 키우고 있는 손바닥 안에서 구현되는 모바일 뉴스 세상은 인간의 나약한(하지만 때론 매우 자기중심적인) 기억력에 대한 패러다임을 단박에 바꿨다.

이제 아무것도 기억하거나 메모하지 않아도 불과 십몇 초 만에 다양하고 정확한 기록을 소환할 수 있다.

변명 삼아 말하자면 세탁기를 선풍기라 부르고, 아이들 이름을 연이어 불러 대는 내 어설픈 기억력은 디지털 의존 탓이다.

그런데 이런 즉시 소환되는 옛 기억들(기록물 혹은 기사 아카이브)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부산일보>를 눈여겨보시는 독자는 기억하실 것이다. 최근 나온 ‘70대 할머니의 미투’ 기사다. 할머니는 젊은 시절 성폭행에 저항하며 상대의 혀를 깨물었는데 오히려 자신이 폭력행위로 더 큰 처벌을 받았다며 최근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할머니는 실명을 당당히 밝히며 언론과 만났는데 정작 더 많이 소환된 것은 당시의 판결문이었다. 당시 재판부는 ‘처음부터 호감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며 두 사람의 혼인을 권장하는 듯한 발언을 했는데 이 내용은 56년 전의 본보 기사에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재판부나 할머니의 상대방은 기억하기 싫은 ‘기억’이겠지만, 디지털 세상에서 ‘기억나지 않을’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안타까운 사연이 또 있다. 한 번은 결혼을 앞둔 젊은이가 사연을 보냈다. 부산에 살다가 외지로 이사 간 지 20년이 지났는데 최근에 결혼할 상대 집에서 어떤 사실을 확인하고 발칵 뒤집어졌다는 것. 20년 전 집안사람이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됐는데 주소, 실명, 사건 내용이 그대로 기사화되어 있고 인터넷 검색이 되니 제발 좀 조처해 달라는 것이었다.

발행한 신문은 종이나 마이크로필름으로 보관돼 있고. 그 역사는 수정하거나 훼손할 수 없지만, 인터넷 기사는 검색이 안 되도록 조치했다. 주로 청소년 기자나 인터뷰이로 사진이 기사화됐던 여성에게서도 기사 내용 삭제 요청이 종종 온다. 자신이 제공한 옛날 얼굴 사진만이라도 지워 달라는 요청은 군말 없이 수용한다. 누구에게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기에 이런 때에도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그렇다고 모든 기억이 사라지거나 혹은 지워져야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들은 분명히 있다. 전두환 씨의 80년 광주에 대한 기억은 생생하게 되살아나야 한다. 아울러 집권 당시 발생한 수많은 의문사에 대한 그의 기억은 반드시 기억되고 기록되어야 한다. 일제가 위안부 피해 할머니에게 한 만행도 결코 잊어서도, 잊혀서도 안 될 기억이다.

어두운 기억의 저편에 존재하는 여러 기억은 때론 잊고 싶지만, 디지털 세상은 부끄러운 기억조차 당당히 소환하는 참 정확한 세상이다.

되새기면, 나치 전범을 공소시효 없이 추적하는 독일이나 이스라엘이 옳다. 동족 간 전쟁으로 아픈 기억만 존재하지만, 전쟁 당시 억울하게 희생된 양민의 시시비비는 가리고, 문제가 있는 책임자는 처벌해야 한다. 어둡고 아픈 기억까지 소환하는 이 디지털 세상이 그래서 두렵고 고맙다.

검지를 칼에 베였다. 어설픈 칼질 탓이다. 어릴 때 토끼풀 베다가 낫에 벤 아픔을 더 기억했다면 이 글을 휴대전화에서 엄지로 쓸 게 아니라 노트북에서 열 손가락으로 쉽게 썼을 것이다.

잊지 않아야 할 기억은 그래서 유용하기까지 하다.

jae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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