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권의 핵인싸] 꼰대가 되지 않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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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물리학과 교수

아직도 학교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나는 공부를 어지간히 좋아하는 모양이다. 솔직히, 교수가 되고 싶었다거나,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기고 싶다는 그 어떤 거창한 열망이나 꿈은 내게는 없었다. 오로지 재미있어서 어찌어찌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확실하게 깨닫는 것이 있다. 갈수록 모르는 게 더 많아진다는 것이다. 마치 더 이상 모르는 게 없을 것 같았던 우물 안을 나와서 새롭고 신기한 별천지를 끝없이 주유하는 것과 같다. 궁금한 것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던 것이 배움의 시작이었다면, 갈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지다가 무언가를 비로소 하나라도 깨닫는 순간, ‘아, 이때까지 이걸 내가 몰랐었구나’ 하는 걸 역설적으로 배우게 된다. 결국 배움이란 나의 아둔함을 나날이 깨달아가는 과정인 것 같다. 도대체 우리의 아둔함은 어디가 끝인가.

배움은 스스로 아둔함을 깨닫는 과정
신념 확신 강할수록 자기 세계에 갇혀
함께 나누는 열린 질문 자성 노력 필요

‘세상엔 두 가지 끝없는 것이 있는데, 하나는 우주가 그렇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아둔함이다. 하지만 우주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실하진 않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그래서 우리가 더 이상의 의문에 종지부를 찍고 어떤 사안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된다는 것은, 결코 끝날 수 없는 온 세상을 모두 섭렵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제 더 이상 배우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유학 시절, 이국적인 언어보다도 충격적일 정도로 다른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학생들이 그 어떤 질문도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수백 명이 운집한 대형 강의실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너무나 기초적인 질문을 하는 것도 어지간히 충격적이었지만, 이에 대해 깍듯한 사과와 친절한 답변을 아끼지 않는 교수님들 또한 아주 놀라운 일이었다. 여차하면 공부 좀 하라는 핀잔부터 시작해서, 스스로의 무지함을 고백하는 부끄러움과 창피함까지 감당해야 했던 나의 경험과는 너무나도 다른 광경이었다. 오히려 쭈뼛쭈뼛 무척 미안해하는 질문자에게 “어리석은 질문이란 원래부터 없다네. 어리석은 답변들만 많을 뿐이지”라며 학생들을 격려하는 흔쾌한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우문현답이 아니라, 현문우답이 대부분이라는 얘기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이런 문화 속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서인지, 난 여전히 어디서나 순진한 발상으로 모르는 것에 대한 직설적인 질문을 참지 못하곤 한다. 그때마다 뜻밖의 질문으로 상대방을 당황케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사실 누구나 만물박사일 수는 없기 때문에, 나의 기대는 크지 않다. 물론 상대방의 답이 나의 의문점을 명쾌하게 풀어줄 수 있다면 더 이상 고마울 데가 없겠지만, 모르겠다는 대답도 좋고, 아직 생각을 안·못 해봤다고 해도 좋고, 아무튼 그 의문점을 공유하는 정도면 충분히 훌륭하고 고맙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질문이 강연이나 대화의 생각을 좇다가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이기에, 같이 고민 하나라도 공유한다는 게 얼마나 고맙고 반가운 일인가.

문제는 이 당돌한 질문이 불쾌함을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액면 그대로의 질문을 넘어서,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며 저의를 의심받는 순간, 대화는 불가능해진다. 실제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말이 아닌, 정황과 분위기로 행간을 읽어내야 하는 콘텍스트(context) 사회의 전형이다. 문제 해결이나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한 공동의 고민이 아닌, 소모적인 신경전과 편짜기, 힘의 논리가 지배하게 된다. 꼰대들의 사회가 그렇다. ‘나 때는 말이야’, ‘내가 한번 해봐서 아는데’로 시작하는, 질문 자체의 무용론이 그것이다. 신념에 대한 확신이 강하면 강할수록, 누구나 나이와 무관하게 꼰대가 될 수 있다.

우리가 매번 90% 정도의 확신을 갖고 판단과 선택을 한다고 할 때, 단 10번이라도 모든 판단에서 올바른 선택을 할 확률은 0.9를 10번 곱한 것으로 약 35%가 된다. 물론 모두 틀릴 가능성도 0.1을 열 번 곱한 것으로 대단히 희박하지만, 매번 90%의 확신을 갖고 임해도 그 선택이 10회를 넘어가게 되면, 맞거나 틀릴 확률이 65% 이상이라는 얘기다. 매번 완벽한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는 한, 선택의 횟수가 많아질수록, 그 모든 것을 다 맞힐 확률은 역설적으로 계속해서 더욱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요지는, 우리는 매번 선택의 순간이 다가올 때마다, 그 이전까지의 선택의 결과들을 교훈 삼아 열린 질문들을 통해 실질적인 확률을 높이지 않은 이상, 늘 90%의 확신이 있다 하더라도 선택이 늘어날수록 꼰대가 되는 일을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있지도 않은 정답을 구하려는 어리석음이나, 이젠 답을 얻었다는 안도감이 필요한 게 아니다. 투명하고 열린 미래 사회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제가 끊이지 않는 선택의 순간마다 함께 나누는 열린 질문과 자성의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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