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대학자가 노비로 전락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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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비로소이다 / 임상혁

<나는 선비로소이다>는 대학자 송익필을 노비로 만든 소송 이야기로 조선의 명문가 안씨 집안과 송씨 집안의 노비소송을 다뤘다. 숭실대 법대 교수인 저자는 두 집안의 소송을 통해 조선의 신분제도, <경국대전>의 각종 법률 규정, 붕당정치로 대립하는 조선 중기 정치 상황을 보여준다.

구봉 송익필(1534~1599)은 시와 문장이 뛰어나 선조대 팔문장가로 꼽혔다. 조선 예학의 시조로 받들어진 송익필은 우계 성혼(1535~1598), 율곡 이이(1536~1584)와 깊은 교유를 했다. 그가 자리 잡은 경기도 교하의 구봉산(현재 파주시 심학산) 자락에는 배움을 얻으려는 선비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최고의 유학자로 사림의 추앙을 받았으나, 1586년 소송에 휘말려 한순간에 노비 신분으로 떨어졌다.

두 명문가 ‘노비 소송’ 시작과 끝
조선 중기 신분제·붕당정치 반영

1585년 말, 안당의 손자이자 안처겸의 아들인 안로의 아내와 안 씨 집안은 송익필의 송 씨 일가가 자기네 노비라고 소장을 제출한다. 소송은 원고와 피고의 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100년도 더 지난 일을 따져보아야 하는 사건이었다. 당시 피고 측의 송익필 아버지는 공신으로 당상관까지 지낸 송사련(1496~1575)이었다.

원고 측의 안씨 가문은 1521년 신사년에 권신 제거 모의를 했다는 죄로 몰락했다. 여기에는 송사련이 안당의 아들 안처겸 등이 역모를 준비한다고 나라에 알렸기 때문이다. 송사변의 고변으로 몰락한 안 씨 집안 안처겸의 아들 안로는 송 씨 집안을 불구대천지 원수로 여기며 앙갚음을 하기 위한 준비를 착실히 했고 그것이 소송으로 이어졌다.

송익필의 할머니인 감정의 신분이 소송 쟁점이었다. 감정은 거족 집안의 고관 안돈후의 비첩인 중금의 딸이었다.

조선의 신분제에 따라 부모 중 한 사람이 노비이면 그 자녀는 노비이므로 감정도 노비 신분을 갖고 태어났다. 감정은 양인인 송린과 결혼해 송사련을 낳았다. 좌의정을 역임했던 안당은 안돈후의 정실이 낳은 아들이며, 감정은 안당에게 배다른 누이다.

안 씨 집안은 소장에서 감정이 속량되지 않았으며, 그 아들 송사련도 양인이 아닌데도 불법으로 관상감에 소속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증거로 103년 전 안돈후의 유서를 내민다. 송 씨 집안은 감정이 양인이 되었다는 증거인 ‘보충대 입속입안’을 찾아내 제출했지만, 노비문서 관리와 노비소송을 관장하던 관서인 장예원은 격식에 어긋난다며 위조 가능성을 제기했다.

결국, 소송은 안 씨 가문의 승소로 끝났다. 송 씨 가문은 완전히 몰락해 70여 명이 모두 안 씨 집안 노비가 되어버렸다. 이 일은 동인과 서인의 극한 대립으로 1000여 명이 죽어나갔다고도 하는 3년 후의 기축옥사로 이어졌다. 임상혁 지음/역사비평사/312쪽/1만 8000원.

김상훈 기자 ne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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