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덕·영도다리… 소설로 녹인 부산 사람의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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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란 소설집 ‘오래된 불씨’




고금란(72) 소설가가 네 번째 소설집 <오래된 불씨>(사진)를 냈다.

부산에 대한 사회학적 기록과, 인생과 삶에 대한 탐구 등이 녹아 있는 단편 7편이 들어 있다. 이번 소설집은 지역 출판사 ‘호밀밭’의 소설선으로 나왔다.

그의 작품에는 ‘부산’이 많이 들어 있다. 영도에서 태어나 만덕동에서 살았던 그다. ‘두껍아 두껍아’는 1500세대가 살던, 말 많았던 만덕5지구 주거환경개선사업에 대한 비판적 작품화다.

사회가 못 한 기록 소설이 대신
‘재벌 특혜’ 부산시 행정 꼬집어
인생·삶의 의미에 대한 탐색도
‘부산의 고단한 삶에 바친 헌사’



결국 LH공사 부채 탕감의 희생자가 됐던 주민들의 사연을 만덕동에 몇십 년을 산 ‘좌천 슈퍼’ 주인 ‘도 여사’의 얘기를 통해 풀어놓는다. 부산 사회와 언론이 관심을 덜 기울인 재개발의 내막과 과정을 소설가가 기록한 것이다.

‘영도다리 난간 옆에’는 영도다리 옆 마을에 살았던 기억을 녹여 쓴 작품이다. 연탄가스에 죽은 친형, 콜레라로 죽은 아줌마, 조선소 용접공을 하다 폭발 사고로 죽은 친구, 생계를 위해 몸을 팔았던 옆집 누나, 그리고 생선 장사와 국밥 장사, ‘깡깡이 아지매’ 일을 했던 어머니…. ‘부산’을 살았던 고단한 삶에 바치는 헌사 격의 작품이다.

이 작품도 슬쩍 지나가면서 시민 재산인 공유 수면을 매립해 특정 기업에 넘겨 부산 사람을 바보로 만든 부산시 행정을 꼬집는다. 단편 ‘무문관’에 공무원 셋이 목숨을 끊은 다대·만덕지구 사업 특혜를 지나가는 삽화로 넣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무문관’은 삶에서 깨침이란 무엇인가를 탐문하는 단편이다. ‘앎’과 ‘암(癌)’은 겹쳐 있다. ‘나라는 암, 나는 누구라는 암, 내가 나를 모른다는 암,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암, 우리는 에고가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그 암 때문에 고통 받고 그 암 때문에 죽는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 암 덕분에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앎은 필요하면서 필요하지 않고, 기실 암으로 상징되는 삶의 고통도 마찬가지다.

이런 모순을 한꺼번에 틀어잡는 중도(中道)가 유무의 경지 너머, 허공의 관문을 통과하는 핵심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유무를 포착하려는 발심의 순간이 바로 깨침의 상태가 아닐까”라고 말하는 것 같다.

표제작 ‘오래된 불씨’와 그 뒤에 실린 ‘꽃병 든 남자’는 노년의 삶 속에 ‘정열의 불씨’와 ‘아름다운 꽃병’이 있다는 것을 일깨우는 작품이다.

삶은 ‘불쑥불쑥 그냥 알아지는 것들이 있어서 신기할 때가 많은’ 그런 것이다. 삶의 꽃병에 다음과 같은 지혜의 꽃이 꽂혀 있다. ‘어쩌지 못하는 일에 더 이상 근심하지 않는 것’‘삶은 살아내는 것이지 배우는 게 아니다’. 그런 언저리에 저마다 숨겨 놓은 삶의 ‘오래된 불씨’도 있는 것이다.

1995년 등단한 작가는 그간 5권의 소설집과 산문집을 냈으며 2011년 부산소설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부산소설가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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