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영의 시인의 서재] 앤 섹스턴의 시를 읽는 가을 아침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시인·‘시와사상’ 편집위원

긴 장마가 지나갔다. 폭우가 쏟아졌다. 태풍이 다녀갔다. 다시 태풍이 가까이 온다는 소식이 들린다. 태풍 ‘마이삭’이 침실 창문을 스쳐 갈 때는 두려웠다. 창문에 실루엣 쉐이드를 내리고 커튼까지 쳤다. 우리 내면에 잠든 야수가 깨어났는지 태풍은 사나웠다. 새벽 한 시에 깨어 조심조심 커튼 사이로 거리를 내려다 보았다. 가로등이 휘청휘청 흔들거렸다. 아, 정전이 되면 어떡하지. 방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워도 잠들 수가 없었다.

잇단 태풍에 ‘불안’과 ‘화’에 대해 생각
한국 사회 ‘화병’ 일상에 잠재한 억압 탓
분노 해소할 출구, 개인적 문제겠지만
사회 전체의 책임도 간과할 수 없을 것

창틀의 빈틈을 휘젓는 바람 소리는 맹수의 신음 같았다. 성난 바다가 포효하는 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불안에 사로잡히는 순간에 잠들 수 있는 비법이 무엇일까. 나는 무엇을 걱정하는가. 지하실에 주차한 자동차가 물에 잠길까 염려되고 창문이 깨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어쩌란 말인가, 차라리 이 순간에 집중하자’라는 생각이 스쳤다. 틱낫한 스님의 책 <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를 읽었다. ‘화(anger)’에 대한 명상을 편안한 문체로 쓴 글이다. 책을 덮고 ‘나 자신이 태풍이다’라는 다소 엉뚱한 상상을 했다. 신기하게도 나 자신이 태풍이라 생각하니 두려움이 사라졌다. 태풍에게 속삭였다. ‘이제 그만 고요해지자.’ 칭얼거리는 아이의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리듯 폭풍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분노를 자극하는 상황이 벌어질 때 유독 화를 잘 내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불안하다. 고함을 지르고 분이 풀릴 때까지 상대를 위협하는 사람을 보면 독사가 떠오른다. 눈빛은 벌겋게 타오르고 타자를 집어삼킬 태세로 덤비는 모습을 보면 피하고 싶어진다. 아마도 생존 본능이 발현되는 탓일 것이다. 분노에 쉽게 함몰되는 사람을 관찰해 보면 대개 자존심이 아주 강하고 자신의 권리나 영역이 침해당할 때 과도하게 반응한다. 성이 난 자신에 대한 자각이 부족하고 자신의 분노가 정당하다는 것에 더 의미를 부여한다. 분노 유발자는 마땅히 응징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체화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분노의 희생자가 된 타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아예 안 되는 경우도 있다. 미친 듯이 분노한 후에 “미안하다”라고 사과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드물다. 나라는 주체는 수시로 변화하며 단 한 순간도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면밀히 살펴보면, 에고(ego)에 사로잡힌 자존심은 그토록 중요한 게 아니며 사랑이나 배려가 훨씬 더 위대한 가치이다.

한국 사회에 ‘화병’이 많은 이유는 일상 안에 잠재한 억압과 분노가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격적 성향이 두드러져 화를 드러내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을 회피해 내면에 차곡차곡 저장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술 취한 남편이 술을 핑계로 미쳐 날뛰면 어쩌겠는가. 가족의 허물은 곧 나의 허물로 귀결되는 문화 탓에 다수의 사람들이 내면에서 병을 키우는지도 모른다. ‘자신만이 옳다’는 환상에 집착할수록 분노 지수는 더 올라간다. 화는 전염병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부정적 에너지를 전파한다.

분노를 잘 다스리는 방법은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문제이지만 사회 전체의 책임도 간과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인들은 대체로 부당한 인권 침해로 판단해 분노를 느껴도, 일본의 극우주의자들은 지나간 일을 곱씹는 성가신 사람들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분노를 이해하는 방식이 다각적으로 검토되어야 하고, 쌓인 분노를 적절히 해소할 탈출구가 필요하다. 한국 여성들이 가사 노동이나 섬김 노동에 할당하는 시간은 아주 많은 편이다. 모성을 미화시키는 가부장적 담론의 영향 아래 직장 여성들이 일상에서 겪는 사소한 분노를 미국의 여성 시인인 앤 섹스턴(Anne Sexton)도 체험한 듯하다. 그녀는 미국의 ‘고백파’ 여성 시인인데 안타깝게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시 ‘천사와 더불어(Consorting with Angels)’에서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다.

‘나는 여자인 것이 피곤했어요, 숟가락과 주전자도 피곤했어요,/ 나의 입과 유방도 피곤했어요,/ 화장품과 실크 옷도 피곤했어요,/ 내가 제공하는 음식 주위에 둥글게 모여 앉은/ 남자들은 여전하더군요./ …나는 사물들의 젠더도 피곤했어요.’ 여성이 일상에서 겪는 분노의 감정이 쌓이는 상황을 반복적인 어투로 토로한다. 이 시를 읽으며 깊은 공감을 느낀다. 아침마다 식탁을 차릴 때, 몇 번씩 불러야 겨우 와서 앉는 남자들이 나도 피곤하다. 조금 일찍 와서 숟가락이라도 놓아주는 매너를 기대하지만, 여전히 오지 않을 때 나는 화가 올라온다. 수천 번이나 반복된 상황인데, 이것은 변화하지 않는 일상의 잔잔한 폭력인지도 모른다. 여성들은 가끔 화가 난다. 앵그리 버드(angry bird)처럼.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