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영 칼럼] ‘제비뽑기’야 너는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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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아들 병역 특혜 의혹 공방이 점입가경이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딸 대학 입학 특혜 의혹의 2탄 성격이 짙다. 다르다면 검찰과 여권의 대립 구도에서 여야가 맞붙는 형국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진실보다 말 폭탄의 포연만 자욱하다. 서로 어찌나 화력을 집중하는지 어느 쪽이나 ‘피로스 승리’로 끝날지 모르게 됐다. 이 말은 ‘이겨도 결코 득이 되지 않는 승리’’를 의미한다. 고대 로마 전쟁에서 유래된다.

추 장관이 얽힌 이번 일에서 또 눈에 띄는 단어가 제비뽑기이다. 평창 동계올림픽 때 통역병을 뽑는 과정에서 시행됐다고 한다. 실력이나 면접으로 카투사(KATUSA·미군에 배속된 한국군) 중에 선발하려 했는데 워낙 청탁이 많아 어쩔 수 없이 도입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그 대상에는 당시 카투사로 근무하던 추 장관의 아들도 포함돼 있었다. 추 장관의 입에선 다른 말이 나왔다. 14일 국회 정치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제 아이인 줄 먼저 알아보고 군 내부에서 원래의 정상적인 방식을 바꿔 제비뽑기로 떨어뜨렸다는 사실을 이번에 알았다”라고 답변했다.

추 장관 아들 병역 특혜 의혹
상호 공방으로 포연만 자욱해
남는 건 정략적 이익뿐일지도

공의와 정의가 파손된 사회
그 후유증 고스란히 국민 부담
추첨이라도 선거에 도입할 지경



두 입장의 차이는 자못 크다. 현재로선 추 장관의 발언만 가지고 정확한 의도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 단지 맥락으로 따지면 통역병으로 선발될 수 있는데 역차별을 받았다는 서운함으로 들린다. 별 청탁이 없었다면 추 장관 아들이 힘센 엄마를 둔 죄로 불이익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아니라면 군 관계자의 판단은 형평성을 찾은 기지로 평가받을 만하다. 다른 군 복무인 의무경찰 선발도 현재 공개 추첨으로 이뤄진다. 의경 인기가 꽤 높다 보니 지금도 부탁이 있는 모양이다. 선발 방식이 제비뽑기여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관계자의 고백을 들은 적이 있다.

추 장관 아들 같은 구체적인 사안에 있어서 제비뽑기의 모습은 이리 판이하다. 그렇지만 역사는 우리에게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공정과 형평, 직접, 공동체라는 가치가 담긴 제도로 전해지고 있다. ‘제비’의 어원은 ‘잡다’의 명사형인 ‘잡이·잽이’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있는데, 한자로는 ‘추첨’이라고 한다. 고대에는 점의 일종으로, 운명을 미리 알려는 점복(占卜)의 형식이었다. 그러한 종교성은 이후에 정치나 전쟁에서 주요한 사안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활용됐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동서양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에서 당나라로 가던 사신들이 풍랑을 만나자 나뭇조각들을 이용해 섬에 남길 사람을 뽑았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서양에서는 이런 행위가 차고도 넘친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지도자나 고위 공직자 대부분이 이런 방식으로 정해졌다. 신화나 성경에서도 어렵지 않게 비슷한 내용을 만나게 된다.

우리 선조나 고대 그리스인이 이런 방법을 취할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 정도로 짐작된다. 첫째가 보통의 시민도 공무를 충분히 수행할 능력이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특권층이 지도자가 되면 참주(독재자)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는 경험에 기반한다. 두 번째는 자연스레 결론이 나온다. 서로 공직을 차지하려는 분쟁을 막기 위해 가장 공평한 제비뽑기를 선택했던 것이다. 이를 우리나라 선거와 정치에 투영해 보자. 투표함 앞에 설 때마다 곤혹스러웠던 기억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 “투표용지에 부자나 교수, 법조인만 있느냐”라는 의문을 말한다.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나 자영업자, 주부는 정치권에 진입할 기회조차 없다. 시간과 자금과 조직에서 불리해서다. 수직으로 기운 운동장을 연상케 한다. 다수와 약자, 지방의 이익이 제도로 뒷받침되는 게 아니라 권력자의 시혜에 좌우되는 후진적인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재산가와 엘리트들이 권력마저 잡는 걸 부끄러워하는 선진 유럽과 극명하게 비교된다. 게다가 패거리 문화와 여론몰이, 정보 왜곡으로 세력을 지키려는 정치꾼의 행태는 현 선거 제도 자체를 불신하게 만든다.

그 부조리를 일거에 없앨 해결책은 사실 묘연하다. 그렇다 보니 제비뽑기를 현실 정치에 도입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반대 논리는 뻔하다. 아무나 뽑으면 능력이 부족해 국정 운영에 혼란이 온다는 반박이다. 그러나 그 ‘아무나’가 국민이다. 당첨 방식으로 해도 지금의 정치인들보다 민의를 더 대변했으면 했지 부족할 리가 없다. 정치인들도 입만 열면 ‘현명한 국민’이라고 추켜세우지 않는가. 물론 당장 선출직 공무원을 추첨하는 장면을 상상하긴 어렵다. 이런 제안까지 할 정도로 한국 사회에서 불공정이 난무하고 있다는 점이 슬플 뿐이다. 공의와 정의가 파손된 사회의 후유증은 공동체 전체가 앓게 된다. 추 장관 아들의 통역병 선발 과정에는 이런 고뇌와 갈등이 함축돼 있다. gap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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