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美 연방대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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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8년 <지혜의 아홉 기둥>이란 제목을 단 책이 국내에 소개돼 화제를 모았다. ‘미국을 움직이는 숨은 저력, 연방대법원!’이란 부제가 달린 데서 알 수 있듯이 미국 연방대법원을 심층적으로 취재한 저서이다. 성역으로 여겨져 베일에 둘러싸인 곳의 내밀한 부분까지 다뤄 흥미를 끌었다. 저자는 워터게이트 특종 보도로 퓰리처상에 빛나는 밥 우드워드. 그는 수백 명을 인터뷰해 사실성을 높였다. 최근 트럼프와의 직격 인터뷰를 담은 신간 <격노>를 펴낸 그 사람이다.

‘아홉 기둥‘은 미국 연방대법관 숫자를 뜻한다. 이 책은 딱딱하고 무미건조할 것 같은 대법원 내부를 다양하게 전한다. 국가 분열을 일으킬 만한 중대사를 판결하는 모습을 묘사한 부분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대법관의 판결문도 철학 서적을 보는 느낌을 줄 만큼 명문이다. ‘기념비적인 판결’이라고 이름 붙여도 전혀 손색이 없다. 미국 사회에서 연방대법관이란 존재의 비중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한국의 헌법재판소와 대법원 역할을 동시에 한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구성원의 신분이나 영향력에선 차이가 크게 난다. 종신직이라는 점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이들은 은퇴 의사를 밝히거나 갑자기 사망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물러나지 않는다. 그들이 내린 결정을 두고 국민이나 정치권의 심판을 받을 일도 없다. 이는 대법원 판결이 미국 사회에 지각 변동을 가져오는 기반이 된다. 그렇기에 현직 대통령의 대법관 임명은 정권의 운명을 좌우할 중대사에 속한다. 트럼프 대통령도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제외하면 대통령이 내리는 가장 중요한 결정이 바로 대법관 지명일 것”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관이 18일(현지시간) 향년 87세로 별세했다. 그는 ‘진보 진영의 아이콘’으로 불렸다. 2015년 한국을 방문해 성 소수자들을 격려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의 사망을 애도할 겨를도 없이 차기 대법관 임명이 최대 쟁점으로 떠올랐다. 대선을 불과 두 달 남겨 놓은 시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후임 지명을 서두르고 있어서다. 반대 여론이 거세다. 차기 대통령에게 넘기라고 주장한다. 현재 대법원의 이념 지형은 보수 5명, 진보 3명. 현 대통령이 보수 성향의 대법관 임명을 한다면 결과는 뻔하다.

미국 연합대법원은 보수·진보 균형을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삼고 있다. ‘기둥’은 그런 균형 속에서만 무너지지 않으니까. 대법관 한 명의 운명(殞命)이 미국의 저력을 시험 중이다. 이준영 논설위원 ga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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