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형제들] 23번째 증언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죽은 사람들이 뭘 알겠어"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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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육아원·복지원 수차례 잡혀가
소대장에게 맞아 어깨 힘줄 끊어져
야간 경비 서다 필사의 탈출

입소 기록 없어 '사라진 세월'
가끔 '동료들' 묘 방문 넋 기려

※편집자주-1987년 봄, 부산 사상구 주례동 백양산 자락. 육중한 담장 너머로 '형제복지원'의 참상이 세상에 알려졌다. 12년 동안 공식 사망자만 513명. 이후 33년이 지나서야 올해 5월,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작은 한 걸음을 내디뎠다. <부산일보>는 '살아남은 형제들-형제복지원 절규의 증언' 영상구술사 프로젝트를 통해 피해자들 기억 속 진실의 조각을 맞춰보려 한다. 33인의 목소리가 모여 33년 전 '한국판 아우슈비츠'의 실체를 밝히는 한 걸음, 수만 명 피해자의 아픔을 치유하는 다음 걸음으로 이어지길...('살아남은 형제들' 시리즈는 매주 토요일 연재됩니다.)


<간추린 이야기>

'황송환' 혹은 '강성철'. 사람은 하난데 이름은 두 개. 형제복지원 출신 중에는 이름이 여럿인 이들이 있다. 수용번호로 관리되는 세상에서 이름은 중요하지 않았다.

황송환(68) 씨는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가명을 만들었다. 황 씨는 거리 생활을 하다 60년대 후반 형제복지원의 전신인 형제육아원(용당동)에 잡혀 들어갔다.

도망나왔다 다시 들어가기를 반복하며 박인근 원장에게 맞고 또 맞았다.

겨우 빠져나와 서울시립아동보호소, 부산소년의집을 거쳐 1975년 남포동에서 또 한 번 악연이 시작됐다. 넝마주이를 하다 '선도' 완장을 찬 이들과 마주친 것이다.

"타라!" "니네가 뭔데 타라 그러노?"

선도원들은 사정을 봐주지 않고 집어던지 듯 황 씨를 차에 태웠다.

주례동 형제복지원에 도착해 이름을 묻는데 순간적으로 '강성철'이란 석 자를 떠올렸다. 박인근 원장이 형제육아원 시절의 자신을 알기 때문에 본명을 말하면 맞아죽겠다 싶었다.

가명으로 지낸 4년. 가장 팔팔할 나이인 20대 청년에게도 기합과 구타, 강제 노역은 견디기 힘들었다.

하루는 이빨이 아파 치료를 요청했다. 1년은 기다려야 한다는 소대장의 말에 대들었다가 밤새 구타가 이어졌다.

"그만 좀 때려라 새끼야!" 견디다 못해 소리를 질렀지만 소용없었다.

오른쪽 어깨만 집중적으로 맞아 힘줄이 끊어졌다. 어깨가 상한 줄 모르고 형제원 안에서는 노역, 밖에서는 일용직 생활을 했다.

하루는 박인근 원장이 "경비를 서 보라"고 제안했다. 하루 세 개비 주던 담배를 한 갑씩 주는 게 좋았다.

2인 1조로 야간 순찰을 돌던 겨울. 도망가는 아이들을 눈감아 주기도 했다. 그러다 1979년 2월 '이렇게 살 순 없다'는 생각에 탈출을 감행했다.

마음 같아선 모든 소대 문을 다 열어주고 싶었지만, 중대장이 열쇠를 차고 있던 터라 어쩔 수 없이 혼자 담장을 넘었다.

뒤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낭떠러지로 굴렀지만 아픔도 잊고 죽어라 뛰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구포역이 나타났다. 기차 탈 차비가 없어 다리 건너 김해 딸기밭으로 갔다. 일하며 먹는 쌀밥이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중국집, 용산시장 짐꾼을 거쳐 케이블 공사 등을 하며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다. 부산에서 초량역 지하철 공사, 경북 월성 원자력발전소 공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2012년 형제복지재단 뉴스를 보고 다짜고짜 인권위 부산사무소를 찾아갔다. 이를 계기로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 대책위'와 연결돼 피해자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황 씨는 가끔 '영락공원' 무연고자 묘지를 찾는다. 형제복지원에서 이름없이 숨진 '동료들'의 넋을 기리며 술을 따르고 담뱃불을 붙인다.

이들과 달리 황 씨에겐 이름이 있다. 하지만 남아 있는 형제복지원 관련 기록에 '황송환' '강성철' 두 이름이 누락돼 있다. 그와 같은 처지인 피해자들이 부지기수다.

1991년 기록을 떼러 형제복지원 입구까지 갔다 두려움에 발걸음을 돌린 게 '한'이 됐다.

호적이 잘못 돼 황 씨의 주민등록상 나이는 10살이나 어린 1962년생(58세)이다. 노인 혜택을 받으려면 한참 멀었다.

"나는 보상 같은 거 필요 없습니다. 이빨 치료나 좀 받을 수 있으면 좋겠구먼..."

형제복지원(주례동) 전신 형제육아원(용당동) 시절 아이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형제복지원(주례동) 전신 형제육아원(용당동) 시절 아이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더 많은 이야기>

■ 자고 있는데 "타라!"

용당동(형제육아원)에 끌려갔다가 주례동(형제복지원)에도 끌려갔습니다.

67년도 초량시장에서 자고 있는데 순경이란 놈이 "마! 일어나! 집이 어디고?" 그래서 "집이 없습니다" 했드만 바로 막 차에다가 태워갖고 그 용당동(형제육아원)에 끌려갔다가.

그때 막 피부병에 걸려갖고. 바다 모래로 해갖고 수세미로 해갖고. 박박 문질러서 한 일주일 하고 나니까. 이게 슬슬 벗겨지는 거라.

튀어 나오다 붙들려갖고 또 끌려가고. 박인근이한테 막 곡괭이 자루 갖고 쥐어패기 시작하는데. 사정없이 막 얻어맞고...

거기서 나오고 나서 이제 또 한양(서울)으로 가갖고 시립아동보호소로 갔어요. 제식훈련 시키고. 군대식이라 마.

69년도에 또 탈출해서 용산에서 '도둑기차'를 타고 부산에 내려와갖고. 중앙동에서 이래 자고 있는데 (부산)소년의집 차가 오더라고요. 그래 가지고 거기 갔는데 완전 천국이라. 강냉이죽 같은 거 먹고...

75년 무렵에 남포동에 가서 넝마주이 하는데 '선도' 완장 찬 놈들이 세 놈이 딱 와갖고 "타라" 그래요.

"니네들이 뭔데 나를 타라 그러노?" 그랬는데도 차에다가 막 집어던지는데... 주례동(형제복지원) 가는 데까지 막 쥐어패기 시작해갖고.

숙소가 군용 천막으로 돼갖고... 홀딱 벗긴 다음에 칼잠을 딱딱 재우는데. 코를 골거나 이빨을 간다거나 이러면 "전부 다 기상!" 호루라기 붑니다.

(기합 중에) '고춧가루' 압니까? '고춧가루'? 면상을 땅바닥에 대고 '원산폭격' 식이라. 지근지근 마 밟고... 어린 것들은 무슨 힘이 있어. 걔네들도 막 때리고 막 쥐어패고.

(새벽) 4시 되면 기상이라. "기상!" 하면은 마 이렇게... 이게 차렷 자세예요. 완전히 군대식이야. 군대식.

하루에 50포대를 나르지 않으면... 그 순서대로 얻어맞습니다. 그래 안 맞으려고 60kg 되는 포대를 지고 막 나르고 막 뛰고 이랬는데. 맨발로 막 뛰고... 추운 겨울에...

1960년대 형제육아원(용당동) 아이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1960년대 형제육아원(용당동) 아이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 밥에서 나온 구더기·쥐똥

"이빨 아픈데 치료 좀 해줄 수 없습니까" 했드만 1년 동안 기다려야 된다는 거라. "이런 새끼가 있노?" 내 바로 욕 들어갔습니다. 소대장한테.

"이 새끼 봐라? 참으라면 참아야 될 거 아니야!" 그때 막 곡괭이 자루로 쥐어패기 시작하는데 (어깨) 오른쪽을. "고만 좀 때려라 새끼야 좀" 밤새도록 얻어맞았어. 밤새도록.

치료 못 받았지 그때. 힘줄 끊어진 것도 모르고 계속 노가다 일만 한 거죠. 작년에 수술을 했습니다. 이거 생각만 하면 치가 떨리네 마.

먹는 것도 제대로 주나. 시장에서 밟고 다니는 시래기... 냄새 쿨쿨 나는 거. 삽으로 그냥 슬슬 훑었는데. 된장을 풀어놓고...

그것도 양이라도 많이 주면 모르는데. 깡보리밥이라고 요만큼밖에 안 주는 기라.

뭐가 '물컹' 하는 기라. 딱 뱉어보니 '구더기'라. 버릴 수도 없고 그냥 먹었죠. 그냥. 씁쓸한 거 딱 뱉어보니 '쥐똥'.

내 초창기에 끌려 들어갈 적인데. '들것' 거기다가 (사람을) 가마니에 똘똘 말아갖고. 두세 번 목격했죠.

용당동에 있을 적에는 한 대여섯 살 먹은 알라(아이)들도 끌려 들어오고. 그 알라들도 밥 빨리 안 먹는다고 쥐어패고 막 하이고... 생각만 하면 그때...

박인근(형제복지원 원장)이 전라도 가서 뒈졌다네. 그 개새끼 그거.

자꾸 욕밖에 안 나옵니다. 미안합니다. 기자 양반.

형제복지원이 주례동으로 옮겨오기 전 용당동 시절 '형제육아원' 입구.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형제복지원이 주례동으로 옮겨오기 전 용당동 시절 '형제육아원' 입구.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 탈출 봐주고, 탈출한 경비원

78년도 겨울쯤 돼서 박인근 원장이 "경비를 한번 서봐라". 그때 새마을담배 (하루에) 세 까치(개비) 나왔습니다. 경비 서니 한 갑씩 나오더라고요.

두 사람씩 서거든요. 한 사람은 왼쪽으로 돌고. 한 사람은 오른쪽으로 도는 기라. 근데 나는 오른쪽으로 돌았다고.

오른쪽으로 돌면서 왼쪽으로 튈까 말까 튈까 말까 생각을 하다가. 거기서 도망가는 사람들 보내주고 그랬습니다. 하도 막 당해갖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게 '여기 오래 있을 곳이 못 되는 구나'. 79년도 2월달... 2월초 돼서 탈출해갖고.

탈출하면서 문 같은 거 다 따줄랬는데. 중대장이 (열쇠를) 차고 다니기 때문에 열쇠를 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가 혼자 튀었어. 혼자.

만약에 붙들렸으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그래 탈출하는데 막... 호루라기 소리 나는 기라. 호루라기. 나 잡을라고.

그래 낭떠러지에 떨어졌는데도 아픈지도 몰라요. 마 죽어라 막 뛰었네. 그때 비가 막 부슬부슬 쏟아졌는데도 막...

그랬드만 어디가 나오냐면... '구포' 있잖아요 '구포'. 구포역에서 딱 내려갖고 차비는 없지. 거기 다리 건너면 '김해'인데.

딸기밭에서 "일 좀 하게 해줄 수 없습니까" 이랬드만. 쌀밥을 그때... 쌀밥이 얼마나 맛있는지 막 두 그릇이나 먹었습니다.

딸기밭 다음에 중국집에 한 3개월 정도 있다가. (대구) 달성동 거기서 머슴살이를 또 했습니다. 목장에...

(서울) 용산시장 가서 배추 같은 거 이렇게 리어카에다 싣고 차에다가 날라 주는 기라. 그거 하다가 '케이블 공사'. 일당쟁이(일용직)로 이 현장 저 현장 전국에 방방곡곡에...(돌아다녔죠)

83년도에 초량에 지하철 공사도 했습니다. 경북 울진에 원자력발전소 한 6개월 정도 공사하다가...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데 끌려가야 되는지.

지금 계속 약 먹고 다니잖아. 형제원에 끌려가는 꿈도 꾸고. 삼청교육대도 끌려갈 뻔했어. 온몸에 흉터가 있기 때문에.

형제복지원 피해자 활동을 하고 있는 황송환(왼쪽) 씨와 한종선('살아남은 형제들' 20번째 증언자) 씨. 황송환 제공 형제복지원 피해자 활동을 하고 있는 황송환(왼쪽) 씨와 한종선('살아남은 형제들' 20번째 증언자) 씨. 황송환 제공
서면 거리에서 형제복지원 피해자 활동을 하고 있는 황송환(왼쪽) 씨와 김대우('살아남은 형제들' 2번째 증언자) 씨. 황송환 제공 서면 거리에서 형제복지원 피해자 활동을 하고 있는 황송환(왼쪽) 씨와 김대우('살아남은 형제들' 2번째 증언자) 씨. 황송환 제공

■ 기록 없는 피해자들

(주례동 형제복지원에서)'강성철'이라고 이름을 속였습니다. 왜 그러냐면 박인근이가 내 이름을 알기 때문에... 용당동(형제육아원)에 있을 적에...

'선도' 완장 찬 놈들한테 끌려갈 적에 '하이고 또 재수없게 끌려가네'. 그러면서 내 생각을 했죠 '속이자! '황송환'이라 하면 박인근이한테 얻어맞을까봐.

국가기록원도 가봤는데 '강성철'이 누락이 됐다는 그게. 말이나 되는 기라 그래? (황송환 강성철) 둘 다 기록이 없는 거지.

91년도에 주례동에 갔는데. 경비는 정문에 있고 몇 사람들이 거기서 돌아다니더라고. 추리닝 입고. 들어가려다가 '아이고 치아뿌리자'. 또 끌려 들어갈까 봐...

그때 기록을 못 찾은 게... 그게 한이 맺힌 거지. 국가기록원, 북구청에도 가보고. 사상구청에도 가보고...

그래 미치는 거예요. 어딘가에 어딘가에 (내 기록이) 있는데...

87년도 박인근이 쇠고랑 차갖고 구속되는 거 텔레비전에 나오더라고요. 2012년경에 형제복지재단 어쩌고저쩌고 해서 세 번 정도 텔레비전에 (뉴스가) 나오길래.

시청 건너에 보면 인권위원회 사무실 있죠? "형제복지원에 갔다 왔던 사람입니다" 그랬드만 한종선('살아남은 형제들' 20번째 증언자)이하고 여준민 (발바닥행동)국장님이 한양에서 내려오셨데.

그러고 나서 KBS 방송 가서 이야기했는데. '그것이 알고 싶다' 기자가 와갖고.

나는 바라는 거는... 이거 '이빨'.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죽을 끓여 먹어요.

호적이 잘못돼갖고... 본 나이는 68인데 주민등록상으로는 (아직 노인 혜택을 못 받는)58로 돼 있네 참.

근데 나는 보상 같은 거 원하지 않습니다.

맞아 죽은 사람들... '영락공원'에 무연고로 묻혀 있다고. 가끔마다 가서 술 한 잔 따라주고 담배도 땡겨드리고.

죽은 사람들이 뭘 알겠어... 저세상 간 사람들이...

이대진 기자 djrhee@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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