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심각한데 조롱까지… 두 번 우는 울산 화재 이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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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밤 불이 나거나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받는 꿈을 꾸기도 합니다. 잠조차 들지 못하는 괴로움을 누가 알겠습니까?”

지난 8일 대형 화재로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된 울산 삼환아르누보 주상복합 아파트 이재민들이 사고로 인한 트라우마를 호소하고 있다. 여기에 인터넷 커뮤니티에 쏟아지는 무분별한 비난 댓글로 심각한 2차 피해를 겪고 있다. 특히 상당수 이재민이 머무는 비즈니스호텔에서 ‘불’을 소재로 한 조롱성 메모까지 발견돼,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이재민들이 실의와 고통에 빠졌다.

울산 아파트 화재 437명 피해
불안감에 식사·수면장애 호소
상실감 더해 트라우마 깊어져
‘호텔 임시 숙박’에 비난 댓글
조롱성 메모에 2차 피해 ‘상심’




울산 삼환아르누보 아파트 주민들이 10일 집에 들어가 챙긴 물건들을 가지고 아파트를 나서고 있다. 오른쪽은 스타즈호텔에 거주하는 이재민 A 씨가 객실에서 발견한 메모지. 화마로 거주지를 잃은 이재민을 조롱하듯 ‘불’과 관련된 대중가요 목록이 적혀 있다. 연합뉴스·A 씨 페이스북 캡처


14일 울산 남구 스타즈호텔 1층에 마련한 재난심리회복지원센터에는 화재 사고로 각종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이재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이곳은 화재 이튿날인 9일부터 이재민을 상대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예방을 위한 심리 지원을 하고 있다. 이날 오전 울산시와 경찰 피해자보호팀, 울산적십자사 등이 집계한 상담 사례는 모두 120여 건에 달한다. 이재민들은 대부분 화재 당시 느꼈던 공포와 불안감을 토로하며 식사와 수면장애를 호수했다. 특히 냄새·소리·빛 등에 상당히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한 이재민은 “매일 밤 그때의 악몽이 되살아나 몸서리가 쳐 진다. 잠을 못 잘 정도로 심장이 두근대고 자꾸만 안 좋은 생각이 들어 힘들다”고 말했다. 다른 이재민도 “불이 날 때 대피하는 과정에서 잠깐 떨어졌던 아이들이 ‘영원히 못 보는 줄 알았다’며 울먹이곤 해 어떻게 마음을 추스리고 애들을 돌봐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숨 쉬었다.

센터 관계자는 “이재민들이 최근 화재 현장을 다녀온 후 더욱 상실감을 느끼고, 트라우마가 점점 심해지는 것 같다”며 “상담사들이 이재민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하는 ‘심리적 응급처치(PFA)’를 하고 있지만 아직 역부족이다”고 말했다. 센터는 상담 후 세밀한 심리지원이 필요한 고위험대상자에 대해서는 남구 정신건강복지센터에 연계해 전문적인 상담을 받도록 조치하고, 센터 방문을 꺼리는 주민을 위해 객실 상담도 진행하고 있다.

시에 따르면 이번 화재로 삼환아르누보아파트 거주민과 상가, 인근 주택 등 주민 437명이 피해를 봤고, 이 중 339명이 지역 5개 호텔과 기타 숙박시설 24곳에서 지내고 있다. 화재 직후 울산시가 이재민에게 ‘호텔 숙박’을 제공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호캉스 즐기냐” “개인적인 일에 왜 세금을 쓰냐” “돈이 남아돈다” 등 비난 댓글이 쏟아졌다. 이에 한 이재민은 지난 12일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차라리 체육관으로 갔으면 좋겠다”며 억울함을 내비치기도 했다.

13일에는 이재민 230여 명이 생활하는 스타즈호텔 객실에서 ‘불’과 관련된 조롱성 메모글이 발견됐다. 호텔 측은 메모지 출처를 확인하고 있다. 객실에서 메모지를 발견한 이재민 A 씨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지난 11일부터 스타즈호텔에 투숙했는데, 다음 날 아침 객실 안 메모지에 글이 적혀 있는 걸 발견했다”며 “다들 더 상처받으실까 얘기하지 않다가 이제야 얘길 꺼내게 됐다. 불 속에서 구조됐던 저희를 향해 이런 리스트를 적어 뒀다는 게 도를 넘은 악의로만 느껴진다”고 말했다.

경찰 피해자보호팀 관계자는 “주민들이 화재로 느꼈을 공포나 불안은 범죄 피해만큼이나 클 수 있다”며 “이재민에게 2차 피해로 이어질 수 있는 비방이나 조롱 행위 등에 대해 즉각 대처하겠다”고 말했다.

권승혁 기자 gsh0905@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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