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만도 못한 삶… 살아서 나와도 사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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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이었다. 피해생존자들이 형제복지원을 설명할 다른 단어는 없었다. 지옥에서 살아남은 형제들은 이후의 삶도 ‘평범’하지 못했다.

“잠들었는데 눈 떠 보니 형제복지원”
집 코앞에 두고 공권력에 ‘납치’당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진 ‘빠따질’
성폭행·구더기 섞인 꽁보리밥 연명
“죽으면 봉분도 없이 산속에 매장
조사하려면 주례동 뒷산 다 파야”
퇴소해도 거지 취급·정신병원 신세
복지원 출신 낙인 오늘까지도 멍에 


■ 인간 청소











위에서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식사 순서를 기다리는 아동들, 2차 공사로 개조된 형제복지원 정문, 형제복지원의 전신인 형제육아원 시절의 고 박인근 원장, 바위를 깨 건축 자재용 자갈을 만드는 원생들, 부랑아 단속 차량에서 내리는 아이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잠들었는데 눈 떠 보니 형제복지원이었어요.” 김수길(47) 씨는 한여름 밤 시민회관 소강당 앞에서 잠자다 ‘납치’됐다. 선풍기가 흔치 않던 시절, 평소 동네 어르신들도 더위를 피하던 곳이었다.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푹 잠든 김 씨. 동천 바로 건너편, 코앞이 집이었다.

“그냥 놀다가 잡혀갔어요.” 부전역 앞을 놀이터 삼아 뛰어다니던 김대우(49) 씨는 경찰에 붙들려 형제원에 들어갔다. 같이 놀던 형과 함께였다. 고모가 찾아와 빠져나왔지만 역전파출소에서 다시 잡혔다. 지금도 김 씨는 경찰만 보면 분노가 치민다.

“너 집 나왔지?” 친구 집에서 놀다 집으로 가는 길. 경찰은 김의수(49) 씨 뒷덜미를 잡고 부암2파출소로 끌고 갔다. 반항하자 수갑을 채웠다. 새벽녘, 몽둥이를 든 덩치 큰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저놈 데려가면 됩니까?” 경찰은 고개를 끄덕였고, 김 씨는 ‘탑차’에 실렸다.

“부영극장 앞 육교에서 포위됐어요.” 남구 용호동에 살던 김상하(52) 씨는 저녁 무렵 버스를 타러 육교를 건너다 단속반에 둘러싸였다. 김 씨 입소기록엔 ‘구걸을 하다 단속됐다’고 적혀 있다. 이름은 ‘상하’로, 나이는 ‘66년생’으로 정해졌다.

“완장에 ‘선도’라고 적혀 있었어요.” 설 연휴, 부산역 대합실에서 고향행 열차를 기다리던 한상현(55) 씨에게 단속원들이 다가왔다. 손에는 국민학교에 입학하는 동생에게 선물할 학용품이 들려 있었다.

“공무원이 집에 보내 준다길래 믿었죠.” 강호야(55) 씨는 심심함을 달래러 영도다리 건너 용두산공원에 놀러갔다. 몰골이 지저분하다는 이유로 ‘가출청소년’으로 몰렸다.

내무부 훈령 410호에 따라 ‘거리 정화’의 대상이 된 부랑인들. 멀쩡한 이들마저 닥치는 대로 잡아들인 ‘인간 청소부’의 다른 이름은 ‘공권력’이었다.



■ 짐승의 삶

“서로 때리라고 시켰어요.” 형제복지원 안에서 엄마와 생이별한 안종환(44) 씨. 아동소대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맞았다. 소대장처럼 보이는 여성이었다. 사이좋게 놀아도 모자랄 시기, 그는 돌아가며 ‘때리기’를 시켰다.

“야, 이 씨XX아. 다시는 찾아오지 마!” 한종선(44) 씨는 조장이 시키는 대로 욕을 했다. 엄마나 마찬가지인 친누나였다. “종선아 집에 가자.” 누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대열을 이탈해 동생 손을 잡아끌었다. 한 씨는 매를 맞다 점점 정신이상자가 돼 가는 누나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옷과 신발에 비누칠하고 빗속을 뛰었죠.” 박해용(45) 씨가 기억하는 ‘빨래’다. 장대비가 오는 날, 운동장 몇 바퀴를 돌면 땟물이 씻겨 나갔다. 입소 당시 ‘건강’했던 박 씨는 현재 자폐성 장애 2급이다.

“어떻게 맞았냐고요? 말로는 표현이 안 되죠.”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진 ‘빠따질’. 김상수(55) 씨가 기억하는 하루다. 8살, 9살, 10살 아이들도 어른처럼 몽둥이로 맞았다.

“하루 50포대 못 채우면 모자란 만큼 맞았어요.” 황송환(68) 씨는 맞지 않으려고 뛰었다. 겨울에도 맨발이었다. 포대 무게는 60kg. 극한의 노역에 늘 배고팠다. 쉰내 나는 꽁보리밥 속엔 구더기·쥐똥이 섞여 나왔다.

“3일 동안 그 소대장한테 당했어요.” 최승우(51) 씨는 입소하자마자 성폭행을 당했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신입소대’로 보내졌다.

“임신이 된 거예요.” 도망치기 보름 전 박순이(49) 씨는 중대장실로 불려갔다. 밤마다 불려갔던 언니들이 얻어오던 과자의 정체를 그때 알게 됐다. 목숨을 걸고 탈출했다. 열 달 뒤 아이를 낳아, 입양 보냈다.

중대장, 소대장, 조장, 서무…. 형제원 내부는 철저한 군대식이었다. 수용자 출신의 간부가 수용자들을 통제했다. 질서 유지를 위해 ‘인권’은 없었다.



■ 묻힌 죽음

“집에 갔을 리는 없는데….” 줄곧 아동소대 조장을 맡은 ‘하마’ 강철민(가명·51) 씨. 맞아서 의무실에 실려 간 뒤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이 있었다. 다른 소대 사정도 비슷했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이들이 족히 수십 명은 될 걸로 예상한다.

“죽었다고 봐야죠.” 이향직(49) 씨와 아동소대에서 함께 생활했던 그 아이. 울음을 그치지 않자 조장들의 몰매가 쏟아졌다. 바닥에 던져 놓은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다 떨림이 멈췄다. 현황판 숫자가 ‘의무실1’에서 ‘병원1’로 바뀌더니 결국 그 아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저씨, 관을 왜 만들어요?” 여느 날과 다름없이 가구반에 들어선 신재현(가명·60) 씨는 기이한 광경을 목격했다. “왜 만들긴? 죽었으니까 만들겠지.” 수많은 관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하루에 2~3번씩 청소했어요.” 중대장실 ‘소지’(청소 역할) 이춘수(가명·51) 씨의 일과는 ‘구타 흔적’ 지우기였다. ‘퍽퍽’ 안에서 들려오는 둔탁한 소리. 비명이 잦아든 뒤 들어가면 바닥은 피범벅이었다. 경비들이 포대에 돌돌 말린 ‘무언가’를 들고나왔다.

“그냥 묻어 버리더라고요.” 김경우(51) 씨가 따르던 어르신이었다. 어느 날 선도실에 끌려가더니 들것에 실려 나왔다. 악대반이라 이동이 자유로웠던 김 씨는 몰래 뒤따랐다. 나무 뒤에 숨어 파묻는 장면을 지켜봤다. 구타로 숨졌지만 ‘병사’로 기록된 이가 많았다.

“내 손으로 묻었단 얘길 어떻게….” 황명식(66) 씨는 형제복지원 초창기 시절 죽어 나간 이들을 많이 봤다. 봉분도 없이 산속에 매장됐다. 황 씨는 제대로 조사하려면 주례동 뒷산 전체를 다 파내야 한다고 했다.

1975년부터 1987년까지 공식 사망자 513명. 피해자들은 실제 사망자가 훨씬 많다고 입을 모은다. 기록은 사라졌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 곪은 상처

“고기 못 먹은 지 몇 달 됐어요.” 형제원과 아동보호소에서 수용 생활만 21년. 김세근(63) 씨가 일평생 바깥 공기를 마신 건 10년 남짓이다. 사회생활에 적응 못 해, 때론 누명을 써, 27년 동안 교도소를 들락거렸다. 형제원에서 만든 호적상 나이는 59세. 노인 혜택을 받으려면 한참 남았다.

“자꾸 환청이 들리니까요.” 6월 초 출소한 이승수(56) 씨는 며칠 뒤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렸다. ‘자신 있으면 뛰어내려 봐!’ 환청에 시달리다 정신을 차리면 일이 벌어진 뒤였다. 농약도 먹어 봤고, 절벽에서 뛰어내리기도 했다. 이 씨는 아픈 몸을 이끌고 매일 아침 폐지를 줍는다.

“거지 취급을 해 버리니깐….” 여인철(60) 씨는 퇴소 후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주소지가 ‘주례동 산18번지’로 돼 있어 ‘형제원 출신 부랑아’란 낙인이 찍혔다. 여 씨는 사상 방면 버스를 타면 형제원 쪽 창가엔 앉지 않는다.

“호주에 가서 일하라는 거야.” 짧게 징역살이를 하고 나온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이 임봉근(73) 씨를 불렀다. 악연은 끈질겼다. 호주 밀페라 골프연습장에서 잔디를 깎고, 손님을 받았다. 임금은 일주일에 고작 20달러. 9년 만에 여동생 집으로 돌아왔을 땐 빈털터리였다.

“20년 넘게 정신병원에 있었어요.” 형제원이 폐쇄된 뒤 한영태(73) 씨와 딸 신애(47) 씨는 갈 곳이 없어 거리를 떠돌았다. 행려병자로 단속돼 울산 언양과 부산 연제구 정신병원에 각각 수용됐다. 2007년 아들 종선 씨가 찾아와 비로소 세 가족이 상봉했다. 언젠가 한집에서 살날을 꿈꾼다.

진상 규명도 책임자 처벌도 없었다. 33년이 흐르는 동안 상처는 덧나고 곪아, 오늘도 피해생존자들의 삶을 옥죄고 있다.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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