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현의 사람 사는 경제] 오래된 연인들처럼 일상화되고 만 노동자들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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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회경제교육연구소장

프로야구 정규 시즌이 끝났다. 부산 야구팬들은 올해도 혹시나로 시즌을 시작했다가 역시나로 시즌을 끝냈다. 오래된 연인들과 롯데 자이언츠의 야구에 공통점은 무엇일까. 예전에 인기 있던 대중가요 가사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다. “저녁이 되면 의무감으로 전화를 하고 관심도 없는 서로의 일과를 묻곤 하지.” 너무 오래 만나다 보니 설렘도 두근거림도 없다는 이야기다. 감동도 없고 재미도 없고, 의욕도 없고 기대도 없이 저녁이 되면 의무감으로 전화를 아니 경기를 하고, 관심도 없는 오늘의 성적을 묻곤 하고. 그래도 꼴찌는 아니라고 자위하며 만족해야 할 것인가?

그렇다면 오래된 연인들과 문재인 정부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지난달 말에 택배 운송노동자가 자신이 운전하던 차 안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되었다. 올해 들어 사망한 택배 노동자가 벌써 15명째라고 한다. 이 택배회사의 경영진은 국민들에게 사과하며 이런저런 개선책들을 내놓았다. 그러나 같은 시간에 다른 택배회사에서는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조건과 불평등한 수익 배분에 항의하며 파업 중이다. 가혹한 노동조건이 어느 한 회사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택배 산업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개선해 나가야 할지를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이야기들은 이미 많은 전문가가 충분히 설명해 주셨기 때문이다. 당연히 정부도 알고 택배회사들도 알 터이다. 내가 참 기묘하다고 느낀 일은, 택배 노동자의 죽음에 대해 뉴스에 나와 말씀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얼굴에서 오래된 연인의 표정을 읽었기 때문이다.

올해 택배 노동자 15명 과로 등 사망
경영진 사과와 함께 대책 내놨지만
열악한 조건·수익 배분 불평등 여전

더 이상 억울한 죽음 없도록 하겠단
발언 속 대통령 표정 결기 안 느껴져
오래된 연인처럼 문제 해결 무신경


뉴스에 나온 대통령은 다시는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택배 노동자가 없게 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대통령이 이런 정도의 발언을 하면 예전에는 당연히 청와대 대변인의 브리핑도 열리고, 정부는 정부대로 여당은 여당대로 온갖 미사여구가 동원된 이런 대책 저런 개혁방안 따위를 내놓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르다. 아무도 들은 척조차 하지 않는다. 마치 처음 듣는 이야기인 듯, 나는 모르는 일이라는 얼굴로 두리번거리며 누구더러 하는 말이냐는 투다. 이것만도 기묘한 일인데 정말 기묘한 일은 그 이야기를 하는 대통령의 표정이 더 심드렁하다는 것이다. 평소에 문 대통령은 어떤 이야기를 하든 사뭇 결연한 표정으로 자신의 진심을 토해 내듯 말하는 스타일이다. 그런데 이번에 본 대통령의 얼굴은 피곤함을 넘어 지루하다는 표정이다. 그리 친하지 않은 직장 동료의 경조사에 봉투와 함께 형식적으로 인사말을 건네고는 함께 간 다른 동료에게 밥은 어디서 먹느냐고 묻는 바로 그 얼굴인 것이다.

택배 노동자만이 아니다. 비정규직 외주 노동자 김용균 씨의 죽음 때도 대통령은 다시는 이런 죽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숱한 노동자가 노동현장에서 죽음을 강요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다. 제대로 된 안전시설만 있었어도, 안전수칙을 제대로 지키기만 했어도 얼마든지 막을 수 있는 죽음들이건만, 몇 푼의 돈을 아끼려는 기업들의 탐욕과 정부의 무관심이 오늘도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그때는 대통령의 표정에 진지함이라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대통령의 얼굴이 저녁이 되면 의무감으로 전화를 하고 관심도 없는 안부를 묻는 오래된 연인을 보는 것만 같다. 김용균 씨가 세상을 떠났을 때 많은 이가 그것을 ‘죽음의 외주화’라고 불렀다. 외주 노동자라는 이유로 더 위험한 일을 강요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대통령과 이 정부를 보니 죽음은 일상화되고 상투화된 것 같다. 늘 출근길에서 마주치는, 그래서 보고도 보지 못하는 거리의 풍경처럼 말이다. 그래도 코로나 바이러스로 죽는 이가 더 많다는 사실에 자위하며 만족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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