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휩쓴 ‘K푸드’의 과거·현재·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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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식사 / 주영하




1905년 9월 20일 고종 황제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딸인 앨리스 루스벨트를 오찬에 초청했다. 오찬 메뉴에는 고종이 즐겨 먹었던 골동면이 주식으로 나왔다. 골동면은 ‘조선식 파스타’로 불렸다. 골동면 재료에는 메밀국수, 소 등심, 달걀, 후춧가루, 들깨가루, 간장, 참기름, 파가 들어갔다.

고종은 앨리스 루스벨트가 귀국해 그녀의 아버지에게 대한제국의 사정을 알려 일본의 마수를 떨쳐버리고 해방되길 도와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미 1905년 7월 27일 미국 육군 장관 윌리엄 태프트와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는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상호 인정하는 비밀 조약을 맺었다. 고종은 그런 상황을 잘 몰랐다. 결국 고종 황제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고, 미국 대통령 딸과의 오찬은 단지 최초의 외국인 숙녀와의 식사로 끝나고 말았다.

한국 음식·세계 식품체제의 만남 주목
‘골동면’부터 ‘짜파구리’까지 흐름 소개
압축 성장 과정 속 한식 성장 역사 다뤄
식량 주권·코로나 속 식생활 문제 짚어


대한제국 황실의 야외 연회 장면으로 추정되는 사진. 1909년 이와타 가나에 사진관에서 촬영했다.  휴머니스트 제공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가 설치됨으로써 대한제국은 일본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 후 한반도에 일본의 ‘화양절충요리’가 들어왔는데 일본인들은 이를 서양 음식으로 판매했다. 1900년대 초반 일본에서 만들어진 화양절충요리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었다. 서양식으로 요리했지만 겉모양은 일본 음식인 것, 일본의 재래 간장 따위로 맛을 냈지만 서양겨자, 후추 같은 서양 식재료를 가미한 것, 식재료는 일본 것이지만 서양의 요리 방식이나 조미료를 사용한 것 등이었다.

한반도가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을 당하지 않았다면 서양식 요리법을 가미한 ‘조선과 서양의 절충요리’가 100여 년 전에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 앨리스 루스벨트가 맛본 골동면은 파스타와 만나 새로운 음식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반도에는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100여 년 후 한국 음식은 서양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지금의 시선에서 보면, 개항과 대한제국 멸망은 한국 음식에서 ‘잃어버린 100년’이었다.

<백년 식사>는 음식인문학자인 저자가 ‘세계 식품체제와 한국 음식의 만남’에 주목해 세계사적 맥락에서 한국 음식문화의 기원을 추적한 책이다. 책은 한반도가 세계 식품체제에 편입되는 1876년부터 대한제국 시기의 ‘개항’, 1910년부터 1937년까지의 ‘식민지’, 1938년부터 1953년까지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을 아우르는 ‘전쟁’, 한국전쟁 이후 1970년대까지의 ‘냉전’, 1980~90년대의 ‘압축성장’, 1990년대 이후 ‘세계화’ 등 여섯 시기로 나눠져 있다. 각 시기에 한국인의 식탁에 오른 음식들이 무엇이었으며, 격변의 시대 속에서 세계와의 만남을 통해 한국인의 입맛이 어떻게 변화해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보여준다.

대한제국 황실에 차려진 서양식 만찬부터 식민지 시기 영향을 주고받은 조선 음식과 일본 음식, 전쟁 대용식과 원조 식량으로 탄생한 분식, 경제성장과 세계화의 과정에서 급격히 성장한 인스턴트식품과 외식 산업, 최근의 K푸드 유행까지, 한국 음식문화 형성의 흥미로운 역사를 생생히 전한다.

조선 음식과 일본 음식은 식민지 시기 영향을 주고받았다. 1920년대 일본산 조미료인 ‘아지노모토’는 식민지 조선의 입맛을 점령했다. 1929년 경복궁에서 개최된 조선박람회에서 아지노모토 본사와 조선대리점은 적극적인 마케팅을 펼쳤다. 조선에서 발행된 일간지에도 냉면, 장국밥, 떡국, 대구탕, 설렁탕 등 국물이 들어가는 음식에 무조건 아지노모토를 넣으라는 광고가 자주 실렸다. 반면 식민지 조선의 갈비는 일본 제국으로 옮겨가 ‘야키니쿠’가 됐고 명란젓은 명란을 소금에 절여 고춧가루를 입힌 ‘가라시멘타이코’가 됐다. 이후 멘타이코는 일본인의 기호품으로서 상품화의 길을 걸었다. 식민지의 맛이 제국의 맛이 된 것이다.

전쟁 대용식 이야기에는 안타까운 역사의 아픔이 담겨 있다. 1939년 일본군이 중국 전역에서 침략 전쟁을 일으킬 때 조선에서 쌀을 절약하기 위해 멸치, 메뚜기, 번데기, 호떡 등 대용식을 권장했다고 한다.

개항·식민지·전쟁·냉전·압축성장의 다섯 시기는 한반도가 세계 식품체제에 편입되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세계화가 전면화되면서 한국에서 생산된 식품과 음식이 다른 나라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영화 ‘기생충’이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상을 받자 뉴요커(New Yorker)들 사이에서 ‘채끝 짜파구리’ 먹기가 유행이었다. 그들이 그 음식을 먹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미 한국이 세계 식품체제의 한 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음식에 대한 에피소드 외에도 식량 주권, 거대한 공장식 농수축산물, 건강한 먹거리, 팬데믹 시대의 식생활 등 문제를 짚어 내며 인문학적 성찰도 제시한다. 주영하 지음/휴머니스트/352쪽/2만 원.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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