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온정은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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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국 부국장 겸 편집부장

어지럽다. 코로나 역병과 불황에 지친 사람들,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젊은이 등 사회 전체가 불안과 불만으로 가득 찼다. 이 와중에 정치권은 여전히 끝없는 말싸움과 편 가르기로 지친 국민들의 분노를 키운다. 정부는 ‘참고 이겨내자’는 말을 연일 강조한다. 견디기 힘든 가학적 풍경이다.

불황의 늪은 ‘도움의 손길’과 온정도 식게 만들었다. 복지모금도 지난해보다 크게 줄어 취약계층의 겨울나기 준비는 더욱 힘들어 보인다. 이맘때면 신문 지면에 자주 등장하던 ‘사랑의 연탄 나누기’ 봉사도 타인과 마주치기를 꺼려하는 ‘언택트 세태’에 묻혀 버렸다. 부산연탄은행의 경우 지난해까지만 해도 추석을 기점으로 기부와 봉사를 하고 싶다는 기업과 단체의 문의가 쏟아졌지만 올해는 한산하다. 모금단체의 정기 후원금을 해지하는 사례도 늘어났다.

코로나와 불황에 지친 시민들
불만과 혼란에 인심마저 메말라

기업·단체 성금과 봉사도 줄어
취약계층 힘겨운 겨울나기 걱정

한 중소기업 사장의 선행과 기부
남을 배려하는 ‘선한 의지’ 감동


인정은 메마르고 상실감은 커져간다. 미래를 잃은 젊은이들과 하루하루 살아남기 전쟁을 치르는 자영업자와 서민들은 마음 둘 곳이 없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 속에서도 변함없이 어려운 이웃을 돕고 기부하는 시민과 기업, 단체들은 아직 많다. 힘들수록 주위를 둘러보는 그들의 선행은 힘겨운 세상살이를 지탱하는 끈이다.

경남 양산에서 연 매출 100억 정도의 알루미늄 부품 생산 기업을 경영하는 K의 경우를 보자. 그는 고등학교 시절 수업료는커녕 버스비도 없어 통학을 못할 정도로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었다. 자퇴를 수시로 생각할 정도로 궁핍했다. 고교 3년간 교복과 체육복 외에 다른 옷을 입어 본 적이 없었다. 학생회장을 하면서 등록금 면제 혜택을 받고 겨우 졸업을 할 수 있었다.

졸업 후엔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책 외판원과 신발 밑창 미싱보조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군대 전역을 하고 양산 지역 중견기업에 취직을 했다. 성실성이 남달라 회사의 인정을 받았고 고졸 학력으로 과장까지 승진도 하게 된다.

모교의 배려에 늘 감사한 마음을 가져왔던 K는 어려운 후배들을 도와야겠다고 다짐했다. 또한 배움에 대한 갈증을 풀기 위해 방송통신대학에 입학, 주경야독 생활도 하게 된다.

결혼을 하고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으나 마음 한구석엔 늘 빚이 남아 있었다. 2002년 고교 졸업 20주년에 마음의 빚을 갚아 나가기로 결심했다. 박봉을 쪼개 연 100만 원 씩 모교에 장학금 기탁을 시작했고, 세월이 흐를수록 액수는 커져갔다. 내년부터는 연간 1000만 원으로 늘릴 계획이다. “어려울 때 남을 돕는 것이 더 기쁘다, 선배의 진심을 받아주는 후배들이 더 고맙다.” K가 늘 강조하는 말이다.

9년 전 알루미늄 부품 생산 업체를 창업한 K는 직원들 자녀 2명까지 고등학교와 대학 학비를 전액 지원하고 있다. 자기계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대학원에 진학하여 경영학 석사, 박사 학위도 취득했다. 회사가 있는 양산 지역 등에 여태껏 기부, 기탁한 금액만 해도 1억 원이 넘는다. 그러나 K의 생활은 놀랄 만큼 검소하다. 직원 40여 명을 둔 중소기업 사장이지만 납품 일정에 일손이 모자라면 공장 기계를 직접 만지며 밤샘 근무도 마다하지 않는다. K를 지탱하는 힘은 감사와 배려심이다.

불황이라지만 K의 회사는 휴일에도 가동을 멈추지 않는다. 전기밥솥, 자동차 부품 등 알루미늄 주조(다이캐스팅) 생산품은 정밀성을 인정받았다. K의 성격처럼 깔끔하고 야무진 제품을 납품하니 주문이 밀려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신뢰와 덕을 쌓은 만큼 일거리도 따라왔다.

창업 5년 만에 연 매출 100억 달성. 이 정도 되는 회사는 어디든 있을 것이다. 특별한 일도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손에 쥐는 이익보다 ‘나눔’을 먼저 생각하는 CEO는 흔하지 않다. K의 ‘선한 의지’와 마음 씀씀이가 동화처럼 아름답다.

“뭐하노? 점심이나 같이 먹자” 휴일 낮에 전화가 왔다. 뜨거운 추어탕을 맛있게 먹었다. 양복 대신 작업복을 입은 K와 오후 시간을 함께 보냈다. 회사 상황 등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내가 돈이 많아서 기부를 하는 게 아니다, 일방적 동정심도 아니다, 힘든 시기를 보낸 나의 작은 배려심이다.”

모처럼 안온했던 그날 저녁, 오래된 팝송을 유튜브로 찾아서 들었다. ‘레어 버드’(희귀조)의 ‘Sympathy’(배려·연민·동정)였다. ‘오늘밤 당신이 침실로 가서/문을 닫고 빗장을 걸 때/어둡고 추운 문 밖에서/떨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해 보세요/세상엔 사랑이 공평하지 않기 때문이죠/…/우리에겐 아픔을 함께 나눌 마음이 필요해요….’

‘희귀조’같은 K를 만나면 어지러웠던 마음도 맑아진다. 날씨가 추워졌다. 올겨울은 모두 따뜻했으면 좋겠다. 


bk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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