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기시감 느끼게 한 바이든의 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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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치유할 시간”이라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일성에 왠지 모를 안도감이 느껴졌다. 지난 4년의 트럼프 시대는 미국 대통령이 정치적·도덕적으로 전 세계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심대한지, 태평양 건너 먼 나라 대통령과 내 일상의 평화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됐는지 제대로 체감해보는 시간이었다. 트럼프 시대가 미국에 남긴 상처는 넓고도 깊다. 그 중 최악은 ‘용광로’를 표방해온 나라의 대통령이 ‘분열’을 국정 동력으로 적극 활용했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인종차별을 부추기고, 법을 무시하고, 폭력을 조장했다. 명백한 거짓말을 ‘대안적 사실’이라 우기는 대통령의 등장에 미국은 극단적으로 쪼개졌고, 이를 지켜보는 세계도 가시지 않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바이든 당선인이 통합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운 건 다행스럽지만 이행은 쉽지 않아 보인다. 무너뜨리는 건 한순간이지만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는 그보다 수 배의 시간과 노력이 드는 법이다.

분열을 국정 동력 삼은 트럼프의 퇴장
“치유의 시간” 바이든 일성에 큰 공감
‘조국 사태’ 이후 심리적 내전 겪는 우리
진영 떠나 공존의 중간지대 복원해야

그런데 트럼프에서 바이든으로 넘어가는 이 상황은 우리에게 강한 기시감을 불러 일으킨다. 국정농단에 분노한 촛불의 힘으로 정권을 쥔 3년 반 전의 문재인 대통령도 그랬다. “지금 제 머리는 통합과 공존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청사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2017년 5월10일, 이날은 진정한 국민 통합이 시작되는 날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문 대통령의 취임사는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으로 갈라진 나라를 다시 하나로 묶어내겠다는 의지로 충만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가? 북한 문제에서는 트럼프와 찰떡궁합을 과시한 문 대통령이지만 국내 정치도 트럼프를 닮았다고 하면 아마 몹시 불쾌해할 것 같다. 그렇지만 현 정부 들어 국론 분열이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다는 현실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의 얼마 전 “8·15집회 주동자는 살인자” 발언은 이 정부 핵심 인사들의 뇌리에 편가르기 마인드가 깊이 각인돼 있다는 의구심을 짙게 했다.

사실 이런 정치적 양극화는 지구촌 곳곳에서 나타나는 구조적 현상이기도 하다. 악화일로인 빈부격차에 대한 분노가 판을 깔았고, SNS의 보편화로 인한 가짜뉴스 범람과 ‘확증편향’의 심화가 날개를 달아줬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소셜 딜레마’에 등장하는 페이스북 출신의 IT전문가는 이런 SNS의 폐해가 불러올 가장 우려스런 미래에 대해 “내전”이라고 답하는데, 대선 이후 난장판이 된 미국을 보면 섬뜩한 예언이 아닐 수 없다.

총만 없다 뿐이지, 우리 역시 ‘조국 사태’ 이후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적 전쟁’을 겪으면서 양 진영이 심리적으로는 ‘공존 불가능’ 지경에 이르렀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을 듯싶다. 지역의 한 중진 의원은 최근 기자와 만나 “김대중-노무현은 물론, 이명박-박근혜 정부까지는 정치적 견해가 달라도 대화가 됐는데, 이젠 그게 안 된다. 서로 공존할 수 있는 중간지대가 사라졌다”고 개탄했다.

이런 중간지대의 황폐화는 진보 지식인들의 잇단 ‘변심’에서도 확인된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서민 단국대 교수 등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하던 이들이 대표적인 반(反)정부 인사로 돌아섰다. 특히 최근에는 1995년 <김대중 죽이기>, 2001년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이라는 책으로 두 번의 진보정권 탄생에 기여한 강준만 전북대 교수마저 “문재인 정권의 ‘내로남불’ 사례를 일일이 정리하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말았다. 거의 모든 게 내로남불이었기 때문”이라며 여권의 권력 남용을 비판하는 책을 냈다. 이들과는 좀 다르지만 공수처 당론에 이의를 제기하다 ‘검찰주의자’로 낙인 찍혀 쫓기듯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한 금태섭 전 의원은 평검사 시절 피의자 방어권 보장법을 세세히 알리는 신문 기명 칼럼을 쓰다 내부 압력에 검사복을 벗었을 정도로 검찰 내 반골이었다.

이런 유형의 지식인들은 연고와 진영적 사고를 떠나 상식과 논리의 일관성을 잣대로 양극단의 균형추 역할을 해왔다. 만약 정권이 바뀌어 현 야당이 지금의 여권과 같은 행태를 보인다면 이들은 또다시 정권의 맹렬한 비판자가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들이 정권의 내로남불에 환멸을 느낄 지경이라고 하면 정권은 응당 자기반성을 해 볼 법도 하지만, 현실은 강성 지지층의 ‘변절자’ 구호만 쟁쟁할 뿐이다. 이래서는 통합이나 공존은 불가능하다. 문재인 정부 남은 1년 반, 우리에게도 치유의 시간이 올 수 있을까. 가망 없는 바람으로 보이지만, 그 단초를 문 대통령의 초심에서 다시 한 번 찾아본다. “잘못한 일은 잘못했다고 말하겠다. 거짓으로 불리한 여론을 덮지 않겠다”는 취임사의 바로 그 초심에서.
 
/전창훈  서울정치팀장. jc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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