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삼의 에브리싱 체인지] 왕은 죽었고 새 왕은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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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인재평생교육진흥원장

11월도 중순으로 치닫고 있다. 시인 나태주는 11월을 가리켜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엔 차마 아까운 시간’이라 했다. 하지만 전염병 때문에 엉망이 돼 버린 우리에게 이 시는 차라리 사치다.

코로나19는 도대체 멈출 줄을 모른다. K방역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불안감은 여전히 팽배하다. 위생방역에 초점을 두면 생활경제가 삐꺽거리고, 그 반대로 하면 생명건강에 구멍이 난다. 지독한 역설이다.

코로나19로 갈림길에 선 인류
단편적 방법으론 위기 못 넘겨
이기적 개인주의의 대안으로
합리적 공생주의 만들어 가야

결국 코로나19는 이 시대의 ‘결정적인 순간’이 되고 말 것인가? 전쟁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인류가 원치 않는 길로 질주하게 되는 갈림길을 ‘결정적 순간’이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정말로 이제 과거로 돌아가는 문이 닫히고 있는 것일까? 페이스북을 열면 응당 떠오르는 행복했던 그 시절은 추억으로만 남게 되는 것일까?

어떤 미래학자는 앞으로 더 강한 위기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현재의 충격이 ‘바닥’이 아닐 수 있다는 경고다. 인생이 그러하듯 역사에는 어떤 일도 발생할 수 있다. 사실 전염병 출현 자체는 작은 문제다.

필자는 인류가 이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을 정말 진지하게 찾지 않는 것이 더 문제라고 생각한다. 현재 많은 국가에서는 단편적으로 방역 방법만을 걱정하고 있다. 그리고 재난지원금을 보조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다. 이건 근본 해결책이 아니다. 이번 전염병 위기는 오랫동안 인간이 자연을 착취한 결과 나타나는 기후변화 때문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이 말은 곧 전염병의 위기가 자연과 인간을 대상으로 극단적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말과 같다.

그러면 당연히 이 전염병은 현 자본주의를 낳은 서구 근대철학과 이를 비판 없이 모방한 아시아 국가들의 천박함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이제 우리는 이 철학과 경제체제에 대해 다시 쳐다봐야 한다. 서구 사람들은 외면하고픈 이 성찰을 우리라도 해야 한다.

돌이켜보면 역사는 늘 평온치 않았다. 종종 파괴적이었다. 지루하게 반복되다가 원인을 다 추적할 수 없는 변수들이 중첩되어 순식간에 결정적 순간을 맞이해 왔다. 요즘은 더욱 그러하다. 생산소비 시스템이 국가 경계를 넘어 연결되어 있다 보니 한 곳에서의 위험이 순식간에 전 세계적으로 퍼져 버린다. 재앙이 세계화되어 있다. 테러 사건, 미세먼지, 원전 사고를 보라. 자연을 착취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뜯어고치지 않는 한 재앙이 세계화된 크레바스 역사는 계속될 것이다. 이를 그대로 두고 있다가는 또 다른 전염병의 역습을 맞을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저널리스트 안희경은 한 책에서 안토니오 그람시와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을 인용하여 언급한 바 있다. “왕은 죽었고 새 왕은 오지 않았다.” 통렬한 비유이다. 우리를 지배해 온 한 철학은 죽었는데 새로운 철학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새 왕을 오게 해야 한다. 과거 문명을 지배하던 철학과 정치경제 시스템은 이제 박물관 같은 곳에 보내 봉쇄해 버려야 한다. 그리고 왕이 없는 이 궐위의 시간에 우리들은 그야말로 많은 논의를 해야 한다. 그리하여 한 300년을 갈 만한 새 왕을 초대해야 한다.

신문명의 왕은 어떤 캐릭터이어야 할까? 크게 볼 때 인간과 모든 생명체가 공존하는 지구 체계다. 소수의 가진 자들만의 이익이 극대화되는 에고(ego) 자본주의는 아니다. 차라리 인간과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 무생물까지도 조화롭게 공존하는 에코(eco)가 주요한 철학일 수 있다. 에고에서 에코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른바 생태자본주의다.

그런데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빙산의 크레바스처럼 깨어지고 있는 국가 간, 계층 간 격차를 그대로 두면 너무 위험하다. 이것까지 고려해 보니 공생자본주의 개념을 생각하게 된다. 공생자본주의는 얼치기 개인주의의 폐기일 수 있다. 이번에 방역 마스크를 거부하는 쓰잘 데 없는 고집 때문에 국가와 도시 전체가 위기에 빠지는 서양 개인주의를 보았다. 해프닝 이상이다.

그러니 동양권에서 사라지고 있는 공동체주의의 장점도 다시 보자.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가 조화롭게 가동되는 합리적 공생주의를 만들어 가는 것에서 방향을 찾을 수 있다. 호모 사피엔스는 역사의 경험에서 학습할 줄 아는 자산을 가지고 있다. 인류가 처한 문명의 한계를 넘어서는 다른 뉴노구상. 이 궐위의 시간에 우리가 직접 새 왕을 구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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