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말 광] <880> 현금자동지급기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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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원 교열부장

될 수 있으면 겹말을 쓰지 말라고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먼저, 글이 깔끔하지 않다. 생각도 좀 없어 보인다. 쓸데없이 공간을 잡아먹기도 한다. 그러니 겹말을 쓰지 않으면 글이 깔끔해지고, 생각이 있어 보이고, 종이를 아낄 수도 있다. 하지만 ‘혹시 내 말이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는 건 아닐까’ 싶은 불안감을 숙주로 삼은 겹말은, 힘이 세다. ‘외갓집’이나 ‘술안주’나 ‘고목나무’처럼, 그렇게나 붙어 다니지 말라고 해도 기어이 결합해서는 표준어 지위를 얻고, 사전에까지 오르기도 한다. 지금도 야금야금 붙으려는 말들을 보자.

‘인근에 위치한 다른 내과는 아예 셔터문이 내려져 있었다.’

셔터가 ‘폭이 좁은 철판을 발[簾] 모양으로 연결하여 감아올리거나 내릴 수 있도록 한 문’이므로, 이 기사에 나온 ‘셔터문’은 겹말이 된다. ‘골프에서, 그린 위에 설치한 지름 10.8cm 정도의 구멍’이 ‘홀’, 혹은 ‘컵’이므로 아래 기사에 두 번 나온 ‘홀컵’ 역시 겹말.

‘3번홀(파3 161야드)에서는 티샷한 볼이 홀컵 왼쪽에 한번 튀긴 후 그대로 홀컵으로 들어가는 홀인원을 기록하기도 했다.’

불안은, 영혼뿐만 아니라 공간까지도 잠식하는 셈이다. 한데, 여기까지 보자면 뭔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다. 즉, 겹말이 외래어나 외국어에까지 촉수를 뻗친 걸 알 수 있는 것. 이 외래어·외국어 겹말에는 꽤 역사가 오랜 것도 있다.

‘또한 국내 제약기업의 MIT대 산·학 협력프로그램(ILP) 참가도 추진되고 있다.’

여기 나온 MIT는 ‘메사추세츠 공과대학(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의 줄임말이므로 뒤에 ‘대’나 ‘공대’를 더 붙일 필요가 없다. ‘UCLA’ 역시 ‘캘리포니아대 로스앤젤레스(University of California at Los Angeles)’의 약자이므로 ‘UCLA대학’으로 쓰면 겹말이 된다.

‘금융위원회는 2023년까지 모든 ATM기를 시각장애인과 지체장애인을 위한 지원 기능을 모두 갖춘 ‘범용 장애인 ATM’으로 교체하겠다고 18일 밝혔다.’

이 기사에 나온 ‘ATM기, ATM’ 중에선 ‘ATM’이 옳다. 현금 자동 지급기(automated teller machine)라는 이 말 속에 이미 기계라는 뜻이 있다. ‘믹서기, 카드리더기, 드라이어기, 주서기’에 붙은 ‘-기’도 모두 겹말용 접사.

*스틸(still): 영화 필름 가운데 골라낸 한 장면의 사진. 광고나 선전에 쓴다.(스틸 광고./스틸 사진.)

국립국어원이 펴낸 <표준국어대사전> 뜻풀이인데, 보기글에 나온 ‘스틸 사진’도 겹말인 셈.

jinwo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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