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이 분노한 노동현실,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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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전태일 3법’ 입법 요구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1970년 11월 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불타는 몸으로 이렇게 절규하며 열악한 근로조건을 고발하고 세상을 떠난 이가 있다. 바로 시장의 한 봉제공장 재단사였던 만 22세 노동자 전태일이다.

최근 노동 현장에서 50년 전 분신한 그 청년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고 있다. 이른바 ‘전태일 3법’을 통해서다. 이는 근로기준법 개정, 노동조합법 개정,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위한 3개 법안을 통칭하는 표현이다. 반세기나 지난 지금 노동계가 전태일을 현실로 불러낸 까닭은 무엇일까.


‘근로법’ 외치며 분신한 지 50년
비정규직·영세 사업장 노동자
현재에도 ‘전태일의 고통’ 여전
과로나 산업재해 사망 잇따라
현행법 밖 신종 노동자도 급증
현실 반영 노동개혁 입법 필요


■민주노총 삭발·철야 투쟁


민주노총 관계자들이 지난 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노동개악 저지! 전태일 3법 쟁취! 국회 농성 돌입 기자회견’을 갖고 삭발식 등 투쟁 결의 행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4일 국회 앞에서 김재하 민주노총 비대위원장과 노동계 대표들은 노동개악 저지와 전태일 3법 쟁취를 위한 삭발식을 갖고 본격적인 투쟁을 결의했다. 이날부터 이들은 국회 앞 철야 농성을 벌이고 있다. 소중한 머리카락을 깎는 것은 어떤 싸움에 나서는 사람의 결연한 의지와 절박함을 드러내는 오랜 상징의식이다. 저항이나 투쟁의 수단이다. 목숨을 던지겠다는 각오이기도 하다. 노동계가 단호한 투쟁 의사를 표출하고 나선 건 정부가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해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 조정법(노조법) 개정을 앞뒀기 때문이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정부가 핵심협약 비준을 핑계로 사용자에 유리하게 노동개악을 시도하고 있다며 강력히 반발한다. 지난 6월 말 정부가 예고한 노조법 개정안에 ILO와 국제 노동계가 요구한 특수고용 노동자와 비정규직의 노조할 권리 보장은 없는 반면 사업장 내 쟁의행위 제한, 산별노조 활동 부정 같은 개악 요소가 많다는 것이다. 양대 노총은 정부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될 경우 전면 투쟁과 총파업을 불사하기로 했다. 민주노총 부산본부도 오는 14일 부산역에서 노동당, 정의당 등 4개 진보정당과 시민사회단체가 개최하는 부산민중대회와 전국노동자대회 지역 행사에서 노동개악 반대와 전태일 3법에 대한 입법을 위한 목소리를 높인다는 계획이다.



■노동계 전태일 3법 직접 발의

이에 앞서 노동계는 전태일 3법 입법에 주력해 왔다. 민주노총은 지난 8월 26일 시작한 국회 온라인 국민동의청원을 통해 근로기준법 제11조 및 노동조합법 제2조 개정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위한 법안들을 발의했다. 각 법안 모두 10만 명 이상의 동의를 받아 내 지난 9월 21일과 22일 각각 국회 소관 상임위원회인 환경노동위와 법제사법위로 넘겨진 상태다. 이후 민주노총은 진보정당, 시민사회단체와 연대해 입법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이어 오고 있다.

전태일 3법은 노동계가 직접 발의했다는 점에서 매우 이례적이다. 그만큼 절실하다는 방증일 게다. 시대와 노동환경의 변화에 따라 비정규직과 프리랜서를 포함한 간접고용 노동자, 보험설계사나 학습지 교사를 비롯한 특수고용 노동자, 택배·배달기사 같은 플랫폼 노동자 등 새로운 직종 노동자들이 급증하고 있으나, 현행법상 정규직 범주 밖에서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서다. 전태일 3법은 사회적 격차와 불평등에 시달리는 신종 노동자를 보호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 이 때문에 민주노총이 국회 앞 삭발과 철야 농성으로 국회의 입법을 압박하는 모양새다.



■왜 지금 다시 전태일인가

전태일의 분신은 노동환경을 점차 개선하고 산업 민주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돼 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노동계는 전태일이 고귀한 생명과 맞바꿀 정도로 간절히 바랐던 세상은 아직도 멀었다고 판단한다. 그가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고 숨진 지 50년이 흘렀지만, 안타깝게도 영세 사업장 노동자와 비정규직이 일하는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다. 현재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 358만여 명이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지 못한다. 교섭권 행사를 제약받는 간접고용 노동자는 346만여 명에 이른다. 220만여 명의 특수고용 노동자에겐 노동기본권이 없는 실정이다.

올해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비대면 시대에 필수노동자로 등장한 택배기사들의 잇단 죽음처럼 과로사와 안전사고로 쓰러지는 노동자가 속출하고 있다. 2001~2019년 산업재해로 사망한 노동자는 연평균 2320명에 달한다. 지난 9~10월 부산에서만 9건의 중대 재해가 발생, 8명이 죽고 1명이 중상을 입었다. 평소 안전조치가 제대로 이뤄졌다면 막을 수 있었던 사고나 책임자 처벌이 미흡한 경우가 많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사업주와 기업의 안전의무를 규정한 처벌법 마련이 절실한 이유다.

이처럼 전태일의 고통은 여전하다. 전태일의 외침 역시 현재진행형이다. “모든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을 적용하라.” “모든 노동자에게 노조할 권리를 보장하라.” “중대 재해기업을 처벌해 노동자가 죽지 않고 일할 권리를 달라.” 전태일 3법은 노동3권(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조차 없어 불안한 오늘날의 전태일들이 염원하는 희망사항이다. 이 법이 필요한 노동 약자는 지난달 취업자 2700만여 명의 37%나 되는 1000만 명 규모다. 노동계는 13일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인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맞아 그를 추모하고 그 정신을 기리면서 그의 이름을 붙인 법안의 국회 통과를 바라는 다양한 행사를 전국에서 펼치고 있다. 전태일을 기억하는 일은 노동의 가치가 존중되는 사회로 가는 시발점이란 인식이 절대적이어서다.



■전태일 3법… 반응과 전망

전태일 3법 입법은 결코 쉽지 않을 전망이다.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아 입법화 과정이 순탄치 않으리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문재인 정부가 3법에 관심을 보이기는커녕 올 연말이나 대통령 임기 내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해 노조법 개정안 처리를 서두르고 있어 독소조항이 많다고 지적하는 노동계와 충돌이 예상된다. 영세 사업자와 자영업자들도 오랜 경기 침체와 코로나19 탓에 경영난이 가중된 상황에서 근로기준법 11조 적용 범위를 모든 사업 또는 사업장으로 확대하는 것에 난감할 뿐이어서 논의와 타결에 난항이 불가피하다.

이젠 국회가 대답할 차례다. 3법 가운데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국민의힘이 긍정적 검토 의사를 밝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지난 10일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이 법안을 민주노총과 함께 발의한 정의당과 협력하기로 해 입법 추진에 탄력이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다만, “과잉 입법”이라는 당내 반발이 있어 법안 처리가 원활할지는 미지수다. 여기엔 사업주와 경영 책임자 처벌이 기업활동과 경영을 위축시킬 것을 우려하는 한국경영자총협회 등 재계의 강한 반대 의견이 작용했지 싶다. 집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경우 처벌법 도입보다는 기존 산업안전보건법을 안전체계 강화 쪽으로 개정할 방침이어서 여야 간 협의에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전태일이 마지막 남긴 말은 “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의 바람에 부응할 수 있도록 달라진 산업 생태계에 맞는 노동개혁으로 평등하고 안전한 나라를 만들자는 게 전태일 3법에 담긴 뜻이 아닐까. 노동자의 권리와 존엄성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함께 사람답게 잘 살기 위한 묘안을 찾기 위해 노사정과 국회가 머리를 맞대기 바란다. 배려와 상생의 자세를 갖는 것은 시대적 요구다.

강병균 위원 kb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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