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보드라운 말 한마디를 기다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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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진 손이 노트에 ‘김순악’이라고 삐뚤삐뚤 써 내려가자, 누군가의 목소리들이 울려 퍼진다. 김순악, 김순옥, 왈패, 사다코, 데루코, 요시코, 마쓰사케, 위안부, 기생, 마상, 식모, 엄마, 할매, 미친개, 술쟁이, 개잡년, 깡패할매, 순악씨. 이 이름들은 한 사람이 일생에 걸쳐 불렸던 이름이다.

18개 이름으로 불린 위안부 피해자
김순악 할머니 다룬 다큐 ‘보드랍게’

위안부 피해 보다 전쟁 이후 삶 조명
할머니 사후 생전 인터뷰·증언 편집
현재와 연결성 강조하려는 감독 의도



가난한 부모는 여자가 공부해서 무얼 하냐며 딸자식을 가르치지 않았다. 여자는 평생 18개의 이름을 가졌지만, 글을 읽고 쓰지 못해 80평생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그녀의 이름, 우리에게 알려진 그 이름은 바로 ‘김순악’이다.

박문칠 감독의 ‘보드랍게’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순악 할머니의 일대기를 해석하고 재구성한 다큐멘터리다. 가난한 마을에서 태어난 김순악. 처녀 공출이라는 말로 뒤숭숭한 어느 작은 마을. 어딘가로 끌려가는 것보다 대구의 실 푸는 공장에 취직해 돈을 버는 게 낫다는 마을 아저씨의 말로 16살 순악은 난생처음 기차를 타고 도시로 간다. 순악은 그렇게 고향 경산에서 만주까지 멀리멀리 끌려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된다.

이때 다큐는 김순악 할머니의 위안부 피해자의 삶을 고통스럽게 조명하지 않는다. 단 10여 분 동안 압축적으로 위안부 피해자의 삶을 정리하면서 관객을 몰입하게 만든다. 이는 애니메이션, 여성 활동가들의 낭독, 아카이브 영상 등을 활용하는 연출을 통해 가능하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제기된다. 감독은 왜 위안부 피해자의 삶을 이토록 짧게 보여 줄까? 사실 감독이 주목하는 바는 ‘전쟁 이후’ 할머니의 삶이다.

해방이 되고 서울에 도착한 21살의 김순악은 고향에 갈 차비가 없다. 배고픈 순악에게 한 남자는 국밥을 사 주겠다며 접근하고 이후 유곽으로 데려간다. 순악은 이미 버린 몸이라는 생각에 일본인에게 몸을 팔기 시작한다. 이후 기지촌으로 흘러들어 색시 장사를 하고, 나이가 더 들어서는 남의 집 식모 생활도 한다. 아들이 둘 있었지만, 함께 살지는 못했다.

가만 보면 할머니의 삶은 위안부 피해자로 돌아온 이후가 더 절망스러웠다. 서울, 군산, 여수, 부산을 오가지만 고향 경산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삶.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는 할머니에게 “어이구 그랬구나! 하이구 참 애 묵었다…”라고 누구도 보드랍게 말 건네주는 사람 한 명 없는 그 시기가 바로 비극이 아니었을까.

박문칠 감독의 ‘보드랍게’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집중하는 다큐다. 그로 인해 우리는 감독이 찍은 김순악 할머니의 살아생전 영상은 볼 수 없다. 이 모든 영상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작업되었다. 즉 감독은 이미 누군가 찍어 둔 할머니의 생전 인터뷰와 증언록을 편집하면서, 여기서부터 할머니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위안부 피해자의 서사를 상처나 한(恨)의 방식으로 보여 주려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이어짐을 확인시키려는 감독의 의도다.

다큐는 김순악 할머니에 이어 어느 순간 젠더 폭력을 경험한 여성 피해자들의 인터뷰로 이어진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사회에서 겪은 폭력을 증언하며, 할머니가 겪었던 폭력들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알린다. 이처럼 다큐는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위안부 피해자의 생애를 전하며 할머니의 삶이 과거의 유물이 아님을 확인시킨다. 또한 경북 사투리는 들어본 중에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스크린을 수놓는다. 11월 중순, 부산독립영화제 기간에 다큐를 볼 수 있으니 발길을 남포동으로 돌려 보면 어떨까 싶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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