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말 광] 881. 흰색은 무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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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원 교열부장

따지고 보자면 희한한 일인데, 흰색을 무색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이를테면 <“마블 슈퍼히어로에 유색인종·여성 이어 성소수자도 나온다”>라는 제목의 이런 기사를 보자.

‘마블 스튜디오가 내놓은 여성 히어로 영화 ‘캡틴 마블’이 흥행을 이어가는 가운데, 마블이 유색인종, 여성에 이어 ‘성 소수자’로도 영웅의 범주를 넓혀갈 전망입니다.’

내용을 보니 유색인종은 ‘흑인, 아시아인’을 가리킨다. ‘유색’의 반대말은 ‘무색’이니, 그러면 백인은 무색인종이 되는 셈인가.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표준사전)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

*유색인종(有色人種): 황색, 동색, 흑색 따위의 유색 피부를 가진 모든 인종. 백색 인종을 제외한 모든 인종을 이르는 말이다. =유색인.

황색, 동색, 흑색 따위의 유색 피부를 가진 모든 인종을 ‘유색’인종이라 하는데 백색 인종은 제외한다니, 그럼 역시 백색은 무색이 되는 셈인가. 백색이 무색이라…. 이런 말이, 말이 될 리가 없다.

의문은 하나 더. 왜 피부색을 ‘백색’과 ‘나머지 모든 색’으로 나누는 걸까. 특히, 황색 인종이 주류인 동북아시아 하고도 한국 땅에서 ‘황색-비황색’으로 나누지 않고, 왜 ‘백인[white people]-비백인[non-white people]’으로 가른 백인들의 분류를 따라가는 걸까.

색깔 이야기를 하나 더 하자면, ‘컬러텔레비전, 컬러사진’도 어색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상대어가 ‘흑백텔레비전, 흑백사진’인데, 그러면 ‘흑백’, 그러니까 ‘흰색·검은색’은 컬러가 아니란 말인가. 빛깔이 아니라는 말인가. 그러고 보면 여기서도 흰색은 ‘무색’인 셈인데….

만물이 자연 그대로 갖추고 있는 빛깔을 ‘천연색(天然色)’이라 한다. 강조해서 ‘총천연색’이라고도 한다. 예전엔 흑백사진과 대칭을 이루기에 맞춤한 ‘천연색 사진’이라는 말을 꽤 자주 썼는데, 요즘은 왜 거의 보이지 않는지도 생각해 볼 일일 터.

색깔에 관한 이런 이상한 생각들은 서아시아를 근동(近東), 동아시아를 원동(遠東)이라 부르며 유럽인 시각을 좇아 다니는 태도와도 많이 닮았다. 우리나라 사람이 대체 왜 우리나라를 ‘먼 아시아[far east]’나 ‘동쪽 끝[극동(極東)]’이라고 부를까. 중국이 스스로를 ‘중화(中華·세계 문명의 중심이라는 뜻)’라 부르는 것과 너무나 대조가 되질 않는가. 지나친 자부심도 문제겠지만, 지나친 비하도 곤란한 일이다. 그나마 요즘은 ‘근동, 원동, 극동’ 따위 표현은 자주 보이지 않아 다행스럽지만, 서아시아지역을 가리키는 중동(中東)은 아직도 널리 쓰이고 있어 꺼림칙하다. 편벽과 편향은 균형을 잡는 데 가장 큰 장애 요인일 터.
 

jinwo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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