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개 소금 팔러 다닌 용호~용당 잇는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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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함께하는 고개와 길] 분포고개

부산 양대 포구에 들던 용호동 분포는 소금 포구였다. 이 일대는 예전에 모두 갯가였고 염전이었다. 화분 같은 큼지막한 질그릇에 가득 채운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내었다. 그래서 분포라 했다. 우리말로 분개라 그랬고 토박이들은 ‘분깨, 분깨’ 그랬다. 햇볕에 말린 소금 천일염이 아닌 구운 소금 자염(煮鹽) 생산지였다. 천일염이 일제강점기 국내 들어온 외래 소금이라면 자염은 조선의 소금이었다. 병치레 잦던 세종이 자염국을 애용했다.



‘어머니가 나를 업고 염전에서 소금을 받아 감만동, 우암동, 문현동으로 다니며 소금을 팔았다.’ 감만동 동항초등 23회 졸업생 최방식 용당새마을금고 이사장은 향토사를 단행본으로 낼 정도로 지역에 해박하다. 최방식 이사장에게 분포고개(사진)는 어머니 추억이 서린 어린 시절이다. 어머니는 분개 소금 담은 목반을 머리에 이고서 고개 넘어 팔러 다녔다. 어떤 날은 소금 목반이었고 어떤 날은 생선 대야였다.

분포고개는 용호동과 용당동을 이었다. 동명불원 오가는 도로가 거기다. 같은 고개를 두고 용호동 사람은 분개고개라 했고, 용당동 사람은 용당고개라 했다. 자기가 사는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랄지 애향심을 같은 고개 다른 이름에서 엿본다. 최 이사장은 용호의 문화와 용당의 문화가 이 고개를 매개로 교류했다며 의미를 둔다. 황톳길 고개는 1970년대 도로로 바뀌었다.

불가에 삼사순례가 있다면 고개도 삼사순례가 있다. 대연동 일대 고개의 삼사순례 시작은 감만 홈플러스. 거기서 문화회관으로 갔다가 수목원 지나 동명불원 넘어가 보자. 석포고개, 돌개고개, 분개고개를 거치는 ‘삼고개순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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