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마장·남광학원 품었던 부산 대표 포구 가던 길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작가와 함께하는 고개와 길] 691. 대연 석포고개



석포고개 전경. 부산 남구 감만동과 대연동을 잇는다. 조선시대 부산 3대 포구에 들던 석포(石浦)를 끼고 있었다. 조선시대 국마장이 있었으며 한국 최초로 사회복지를 실천했던 남광사회복지회가 있었다.  박정화 사진가 제공


포구는 ‘개’다. 개는 포구의 순우리말이다. 정말인가 싶겠지만 옥편이 그 증거다. 거기에 ‘개 포’로 나온다. 옛날 사람은 포구라는 어려운 한자 대신 개를 썼다. 부산진구 전포는 밭개라 했고, 사상구 덕포는 전에 얘기했듯 언덕 덕을 써 덕개라 했다. 바위 언덕이 포구를 내려다봤다. 바위 언덕은 지금도 일부 남아 있다.

‘개’는 고어일까. 아니면 사투리일까. 둘 다 아니다. 지금도 엄연히 쓰는 현대어며 국어사전에 버젓이 나오는 표준어다. 역시 정말인가 싶겠지만 정말이다. 개펄, 갯가, 갯바위, 갯장어 등등이 다 개에서 나온 말이다. 국어사전은 개를 ‘강이나 하천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으로 설명한다.

나라에서 말 관리하던 국마장 있던 곳
나라에 소금 바치던 분포와 양대 포구
고갯마루 남광시장은 남광학원 발상지
전쟁고아들 새 삶 일군 사회복지 성소
감만동~대연동 문화회관 가는 지름길
현재 석포로 대형 아파트 속속 들어서


석포고개 고갯마루의 남광시장.

석포는 돌개라 했다. 조선 어디라도 몽돌이 많거나 갯바위가 많으면 석포였다. 그런 곳은 한둘이 아니어서 인터넷에 ‘석포(石浦)’를 검색하면 수두룩하게 뜬다. 부산은 남구 대연동이 석포였다. 부산박물관 일대가 포구였고 부산문화회관 일대가 포구 마을이었다. 지금은 매립돼 상전벽해지만 석포는 한 시절 부산을 대표하던 포구였다. 부산의 고지도에도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온다. 어떤 지도에는 순박한 인가가 몇 채 나오고 어떤 지도에는 육지 끄트머리에 당당하게 나온다.

석포고개는 석포로 가던 고개였다. 고개는 둘이었다. 용당에서 가는 고개가 있었고, 감만에서 가는 고개가 있었다. 가려는 데가 같아 고개 이름은 비슷했다. 용당에서 평화공원, 유엔공원, 부산문화회관으로 이어지는 고개는 돌개고개였고 감만에서 남광시장,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문화회관으로 이어지는 고개는 석포고개였다.

그렇긴 해도 지금 쓰는 도로명은 완전히 달라졌다. 할아버지 대에선 형제였다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뿔뿔이 갈라진 집안 같다. 돌개고개는 유엔평화로가 됐고 석포고개는 석포로가 됐다. 석포로는 감만 홈플러스에서 부산문화회관까지 왕복 4차선. 거리는 2km 채 안 되지만 버스 정류장은 넷이나 된다. 대형 아파트 단지가 속속 들어서면서 버스 세울 데가 많아졌다.


고지도 ‘영남읍지’에 보이는 석포.

“감만동에서 대연동 가는 지름길이었지. 용당으로 빙 둘러서 가는 길도 있었고.” 고갯마루 ‘남광시장’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노인은 올해 아흔. 마스크를 써서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몇 마디 나눠 보니 연배가 나왔다. 그 연배쯤 돼야 알 수 있는 옛 모습을 술술 들려줬다. 대연동 산 지는 50년. 차 두 대 겨우 지나다니던 석포고개는 그새 이리 넓어졌다. 용당에서도 가는 길이 있었다. 정류소 맞은편 남광시장 뒷산 너머 길이 돌개고개였다.

남광시장은 시장치곤 이름이 특이하다. 시장은 열에 아홉 그 지역 지명을 이름으로 쓴다. 그래야 대표성을 얻기 수월하며 오래 기억한다. 여기 시장도 작명할 때 그런 걸 고려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명 대신 다른 이름을 썼다면 필히 곡절이 있다. 지금은 틀리지만, 그때는 맞았다는 이야기다.

남광시장 이 일대는 사실 기념비적인 곳이다. 한국 최초로 사회복지를 실천했던 남광사회복지회 발상지다. 동항초등학교 교장을 지냈던 감만동 지킴이 이규섭 선생은 남광사회복지회 모태가 광복 이듬해 1946년 세운 남광학원이라고 밝힌다. 남광학원은 어수선하고 가난하던 한국전쟁 시기에는 고아나 갈 데 잃은 아이들을 품었다가 사회로 내보냈다.

남광시장은 남광학원 있던 데다. 일신기독병원 설립자인 호주 매켄지 선교사가 1909년 세운 한센병 치료 전문병원 상애원이 여기 있었다. 한센병 환자는 일제에 내쫓겨 1935년 소록도로 이주했고, 병이 나은 음성환자는 오륙도가 보이는 용호농장으로 이주했다.

1946년 들어선 남광학원은 선각자였다. 먼저 깨우친 자였다. 정부가 고아와 혼혈아를 입양하려고 한국아동양호회를 세운 게 1954년이고 미국인 홀트 부부가 한국전쟁 혼혈고아 8명을 입양하면서 홀트아동복지회를 세운 게 1955년이니 거의 10년이나 앞선 선각자다. 1970년 시설이 금정구 노포동으로 옮겨가면서 서서히 시장으로 바뀌었다. 남광학원 있던 데라서 남광시장, 또는 학원시장이라고 불렀다.

남광시장 있는 곳은 석포고개 고갯마루. 갈 데 없던 아이들이 넘어오던 고갯마루였고 그 아이들이 새 삶을 찾아 넘어가던 고갯마루였다. 넘어올 때는 건드리면 폭삭 내려앉을 것 같던 아이들이 몽돌처럼 단단해져 넘어가던 고갯길. 누구라도 그럴 때 있다. 건드리면 폭삭 내려앉을 것 같은 날들. 그렇다고 해서 누군들 그리 쉽사리 내려앉을까. 그럴수록 몽돌처럼 단단해져 한 고비 두 고비 고갯길 기어이 넘기는 게 우리네 삶이지 않던가. 그런 고개의 으뜸이 석포고개다.

‘황령산에서 용호만으로 흘러내리는 이곳의 하천에 돌, 자갈이 많아 돌개 또는 석포(石浦)라고 하였다.’ 돌은 왜 많았을까. 오죽했으면 지명으로 쓰였을까. 그 궁금증을 남구청이 2014년 펴낸 향토지가 풀어준다. 홍수가 나면 황령산 계곡을 따라 떠밀려온 돌이 그리 많았다. 향토지에는 석포 위치까지 소상하게 나온다. 부산공고 뒷산인 천제등과 조선 수군 전선을 정박했던 전선등 사이에 있었다. 전선등은 옛 부산외대 자리다. 비사등이라 불린 부산박물관 근처도 석포에 들었다.

석포는 대단했다. 그러기에 옛 지도에 꼬박꼬박 나왔다. 1871년 고지도 ‘영남읍지 동래부지도’의 경우 기장을 제외하고 포구란 명칭이 들어간 데는 두 군데뿐. 석포와 분포다. 분포는 소금을 나라에 바치던 공염(公鹽)이 있었다. 포구는 더 있었겠지만, 중요도에서 밀렸다. 그만큼 석포는 대단했다.

석포는 왜 대단했을까. 나라에서 말을 관리하던 국마장이 있었다. 이른바 석포목장이었다. 마성(馬城)이라 불린 성도 있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말은 한 필 한 필 국력이었고 군사력이었다. 대연동 석포에서 용호동 남부면허시험장까지 목책을 두르고 군마를 방목해서 키웠다.

석포. 한때는 부산 양대 포구였으며 나라가 관리하던 국마장이었으며 한국 최초로 사회복지를 실천했던 성소, 석포. 그런 곳을 품은 고개라서 그런지 고갯길 걷노라면 한 걸음 한 걸음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다. “너희가 석포를 아느냐, 너희가 석포를 아느냐.” 남은 모르는 걸 나는 아는 것 같아 어깨에도 힘이 들어간다.

▶가는 길=도시철도 2호선 대연역에서 내려 부산문화회관으로 가면 된다. 거기서 감만 홈플러스까지가 석포고개다. 도중에 일제강제동원역사관, 남광시장이 있다. 고갯길 순례는 감만 홈플러스에서 시작하는 게 좋다. 대연역에서 시내버스 51번을 환승하면 종점이 홈플러스다. 동길산 시인 


dgs1116@hanmail.net
이 기획은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도움을 받아 연재합니다.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