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훈장의 품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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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전 일본 총리가 지난 16일 IOC로부터 올림픽훈장을 받았다. 도쿄 올림픽과 관련한 공로를 표창하는 훈장이었다. 그는 “모든 일본인을 대표해 받는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러나 다수 일본 국민은 거기에 그다지 공감하지 않는 듯하다. 지금 일본 곳곳에선 도쿄 올림픽을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코로나19로 국민이 죽어 나가는데 올림픽이 대수냐는 것이다. 아베 전 총리는 집권 연장을 위해 올림픽을 활용했다는 비난도 받았다.

2016년 배우 소피 마르소는 프랑스 최고 훈장 ‘레지옹 도뇌르’를 거부했다. 같은 훈장을 당시 프랑스를 국빈 방문한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에게도 준 것에 항의하는 뜻이었다. 2015년 사우디아라비아는 인권 탄압이라는 국제 사회의 비난에도 정치범 수십 명을 처형했는데, 이를 주도한 이가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였다.



지난달 4일 별세한 이효재 선생도 훈장을 거부했다. 1996년 김영삼 대통령이 국민훈장을 이 선생과 5공화국 출신에게 함께 수여했다. 민주화 운동에도 헌신했던 이 선생은 군사정권 인물과 같이 취급받는 데 분노했다. 국민훈장은 24년 뒤 그의 영정 앞에 추서됐다.

훈장을 거부한 사례는 이 외에도 왕왕 있었다. 지난달 3일엔 가수 나훈아가 방송 도중 스스로 훈장을 거부했다고 밝혀 이목을 끌었다. 그는 자기가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이라 훈장을 거부한다고 했다. 말은 “훈장의 무게를 못 견뎌서”라고 했지만 실은 훈장이 살아가는 데 거추장스러웠던 게다.

훈장은 영예로운 것이어야 하는데, 지난해 수여된 국가 훈장이 1만 9195점이었다. 그런데 그중 95% 이상이 퇴직 공무원 몫이었다. 관행적으로 끼리끼리 나눠 먹는 훈장을 어느 누가 영예롭다 여길까. 모든 훈장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훈장의 가치가 현저히 떨어진 건 사실이다.

지난 12일 문재인 대통령은 고(故) 전태일 열사에게 국민훈장을 추서했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1000만 비정규직 전태일은 훈장을 거부한다”고 밝혔다. “노동 존중 사회로 가겠다”면서도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등 노동기본권 수호에는 미온적인 현 정부의 이중적 태도를 꼬집은 것이다.

주는 이도 받는 이도 모두 격에 맞아야 훈장이 영예롭게 된다. 그렇지 못하면 훈장은 한낱 쇠붙이일 뿐이다. 이즈음 훈장의 품격이 바닥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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