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최고로 맛있는 한 끼의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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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마음에 새긴 한 끼의 밥이 있다. 만화작가 허영만의 <식객>은 이런 사연을 다뤄 인기를 끌었다. 해외로 입양된 제임스가 찐쌀(전라도 지방에서는 올게쌀이라 부르는 모양)을 매개로 가족을 찾는 사연은 구수한 여운이 남았다. 찐쌀 한 봉지를 안긴 뒤 부모는 아이를 버렸고, 장성한 아들은 찐쌀의 추억을 더듬어 결국 가족과 상봉한다는 내용이다. 고향의 강물 냄새를 찾아서 모천회귀 하는 연어처럼 말이다. 한 줌의 찐쌀은 제임스의 가슴에 깊이 각인된 나만의 아득한 음식 ‘소울푸드’였다.

사람 사이의 따뜻함을 전하는 기사
언론 환경 바뀌었지만 여전히 중요
디지털 시대 조회수로 중요도 평가
불의·차별 맞선 진실보도 가치 여전

가을이 막 시작될 무렵 바다를 보러 갔다. 경주 감포에 갔는데, 마침 오일장이라 할머니들이 자루에 담은 찐쌀을 팔고 있어 됫박의 반만 파시라고 흥정을 했다. “아이고 한 되는 사셔야지”하는 할머니의 지청구를 들으며 찐쌀 한 봉지를 받아 들고 추억에 잠긴다. 찐쌀은 아직 수확하지 않은 벼나 수확이 끝난 뒤 논에서 주운 이삭으로 만드는데, 벼를 쪄서 잘 말린 뒤 도정한다. 양이 적으니 도정 방식은 절구 등을 이용해 겉껍질을 벗기는데 여간 수고스럽지 않다. 비상식량이자 겨울철 훌륭한 간식인데, 주머니에 한 줌 넣고 조금씩 꺼내 먹어야 더 맛있다.

흰쌀밥은 스뎅(스테인리스) 그릇에 고봉밥이어야 좋고, 무채에 고추장을 넣고 참기름을 듬뿍 뿌린 비빔밥은 큰 사발에 담아야 제격이다. 그러고 보면 음식은 그릇과도 궁합이 맞아야 한다. 스테이크는 우아한 접시에 담아야 하고, 회는 차가운 돌 쟁반, 알맞게 잘 삶은 편육은 나무 도마가 어울렸다.

밥이 식사요, 유일한 간식이던 시절 양이 그 질을 담보했지만, 지금은 공깃밥도 반으로 덜어내고 먹는 시대가 되었다. 다소 장황하게 밥과 그릇의 궁합과 그 변천(?)을 이야기하는 것은 기사도 현재는 그렇게 변화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서다. 신문이라는 언론 매체의 기사 작성법이 엄연했고, 신문지면 제작엔 룰도 엄격했다. 사건 기사와 사고 기사를 쓰는 형식이 존재했고, 지면에 들어가는 기사의 제목은 10자 이내로 간결해야 했다. 지금은 아주 다르다.

제목은 스무 자를 훌쩍 넘어서고, 기사의 분량은 제한을 두지 않는다. 아무리 중요한 톱기사라도 6매를 넘지 않아야 한다는 시절도 있었던 만큼 신문 밥을 오래 먹은 이는 격세지감을 말한다. 최근 <부산일보> 디지털신문 부산닷컴(busan.com)에 실린 연재 기사 ‘나는 '대학민국' 고졸이다’ 의 6번째 기사 ‘저임금 고졸은 ‘노오오오력’하지 않은 개인 탓?’이란 기사는 텍스트만 무려 22.4매이고 영상과 그래픽, 다양한 사진을 첨부해서 그 분량이 어마어마하기에 지면이라면 도무지 소화할 수 없는 기사다. 즉, 디지털 시대여서 가능한 기사이다.

고졸이 부끄럽지 않은 대한민국,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하는 주제를 담은 탄탄한 기획 또한 일품이다. 내친김에 자랑을 좀 더 하자면, 최근 한 해 동안 잘 만든 지역신문의 콘텐츠(기사 등)를 평가하고 수작을 심사하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주관 ‘2020 지역신문 컨퍼런스’에서 <부산일보> 디지털센터 이대진 기자 팀이 만든 ‘살아남은 형제들’이 금상의 영예를 안았다. 다양한 그래픽과 영상, 애니메이션을 활용한 인터랙티브 페이지도 돋보였지만, 1987년 형제복지원 폐쇄 이후 수십 년간 숨죽인 채 살아온 피해생존자 30여 명을 만나 당시 인권 유린 참상은 물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피해 실태를 생생하게 알려 수작임을 증명한다.

내용과 형식에서 경쟁작을 압도한 이 기사와 ‘고졸’ 시리즈의 최대 장점은 불평등과 편견, 부당함을 바라보는 ‘곧고 따뜻한 시선’이다. ‘형제들’ 취재를 지켜보면서 애로사항도 들었다. 피해자 대부분이 힘든 삶을 살아 전과자였고, 살림살이가 어려운 분이 많았다. 타인의 아픔을 오래 듣는다는 것은 꽤 힘든 일임에도, 인터뷰는 30회를 훌쩍 넘는다. 좋은 기사는 상대의 아픈 사연을 진정성 있게 듣는 데서 시작된다는 선배들의 말이 맞았다. 동해선 센텀역사 철로에 떨어진 장애 노인을 구하려 몸을 내던진 환경미화원 단독 기사도 가슴을 울렸다. 실수로 전동휠체어를 오작동한 70대 어르신이 철로에 추락할 위급에 처하자 청소하다가 장갑을 벗어 던진 채 한달음에 구조한 환경미화원 김연미 씨 이야기다.

흔히 디지털 시대 기사는 조회수로 평가되지만, 조회수가 많은 기사가 꼭 좋은 기사일 수는 없다. 언론 환경이 바뀌었고, 혹여 독자들은 자극적인 기사에 일시적으로 쏠릴 수 있지만, 여전히 소중한 것은 사람 사이의 따뜻함을 전하는 기사다. 가장 맛있는 밥은 배고플 때 먹는 밥이다.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기사는 다양한 형태로 진화했지만, 여전히 좋은 기사의 기준은 진실 보도와 약자에게 따뜻함을 전하는 데 있다. 


/이재희 편집국 디지털에디터.jae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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