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인문학 기행] 19.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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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빈곤 속에 사라져 간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야경. 이곳은 모차르트의 두개골로 추정되는 유해를 보관하고 있다.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야경. 이곳은 모차르트의 두개골로 추정되는 유해를 보관하고 있다.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의 고향이다. 어디를 가더라도 모차르트의 이름을 볼 수 있고, 그의 음악을 들을 수 있고, 그의 얼굴을 담은 다양한 기념품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모차르트에게는 무덤이 없다. 잘츠부르크에 그의 두개골로 추정되는 유해만 있을 뿐이다. 대음악가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음악적 명성 불구 경제난 속 생애 마감

35세 일기 가난 속 공동무덤에 묻혀

묘지 관리인, 모차르트 ‘흔적’ 남겨 매장

10년 뒤 발굴된 유골, 창고 구석 보관

한 세기 지나 고향 잘츠부르크 돌아와

음악재단 ‘모차르테움’ 전시실에 안치 중

모차르트 두개골 진위 여부, 여전히 논란


잘츠부르크 기념품 가게에서 판매하는 모차르트 인형. 잘츠부르크 기념품 가게에서 판매하는 모차르트 인형.

■갑자기 나타난 두개골

1850년 무렵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유해 사냥꾼이 극성을 부리고 있었다. 그들은 공동묘지에서 유명 인사의 유해를 파낸 뒤 수집상에게 비싼 값을 받고 팔았다.

유해 수집상 중에 자코브 하이트를 이라는 판화가가 있었다. 그는 유해를 구하는 일 때문에 성 마르코 공동묘지의 관리인과 잘 알고 지냈다. 어느 날 관리인이 두개골 함 한 개를 건네주면서 놀라운 이야기를 꺼냈다.

“이 두개골은 모차르트의 것입니다. 50년 전 무덤에서 파내 창고에 처박아둔 것이랍니다.”

자코브는 관리인이 들고 온 두개골 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 두개골이 모차르트라고? 수많은 사람이 그의 무덤을 찾아 헤맸지만, 결국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어. 그런데 지금 모차르트가 내 손에 들어온 것인가?’


■비운의 천재, 요절하다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 5일 아내 콘스탄츠가 지켜보는 가운데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가족은 그의 장례식을 빈에서 가장 큰 성 슈테판 대성당에서 거행하려 했다. 하지만 대성당은 이를 거부했다. 가족은 할 수 없이 대성당 바깥에 있는 십자가 경당의 제단 앞에서 간단하게 장례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가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는 오해 때문이기도 했고, 교회의 미움을 산 프리메이슨 회원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경당 안쪽에는 이런 명판이 붙어 있다.

‘1791년 12월 6일 불멸의 모차르트를 떠나보내는 장례식이 여기서 열렸다.’

모차르트의 실질적 장례식은 빈에서 4km 떨어진 성 마르코 공동묘지에서 조용하게 열렸다. 그의 관은 하루 동안 영안실에 보관됐고, 장례식은 다음날 열렸다. 장례식은 대작곡가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아주 초라하게 치러졌다. 모차르트의 지인이 장례식 장면을 기록한 글이 전한다.

‘아주 어둡고 비바람이 극심했다. 천둥번개가 치고 비바람이 몰아쳤다. 하늘이 모차르트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를 무시한 사람들에게 분노하는 것 같았다. 장례식에는 일부 친구와 여성 3명만 참석했다. 콘스탄츠는 보이지 않았다. 모두 우산을 받쳐 들고 관 옆에서 슬픈 표정을 지었다.’

당시 오스트리아에서는 장례 규정이 아주 엄격했다. 사람이 죽으면 관에 넣어 공동묘지에 묻어야 하는 게 당시 법이었다. 평민은 개인 무덤을 만들 수 없었다. 공동무덤을 써야 했다. 공동무덤 하나에는 어른 4명과 어린이 두 명을 함께 묻었다.

모차르트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평민에 불과했던 모차르트는 공동무덤에 묻혔다. 일부에서는 모차르트가 죽을 때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극빈자 공동무덤에 묻혔다고 주장하지만, 근거가 없다는 게 일반적 설명이다.

공동무덤은 대개 7~8년, 길면 10년 뒤에 다시 파내는 게 규정이었다. 새 시신을 묻을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묘지 관리인은 모차르트를 묻을 때 귀에 철사 고리를 걸었다. 나중에 다시 파냈을 때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모차르트의 무덤은 10년 뒤인 1801년 다시 발굴됐다. 관리인은 모차르트의 두개골을 꺼내 형태를 기록한 뒤 공동묘지 창고 한쪽 구석에 넣어두었다.


■잘츠부르크로 돌아가다

자코브는 모차르트의 두개골을 다른 사람에게 팔지 않고 사무실에 보관했다. 그가 죽은 뒤 동생 조제프 하이트를이 때 묻은 종이에 싸여 있는 두개골을 뒤늦게 발견했다.

조제프는 당시 유럽에서 유명한 의사이자 해부학자였다. 그는 법의학을 연구하려고 두개골을 수집하곤 했다. 노년에는 평생 수집한 두개골을 미국 필라델피아의 뮈터 박물관에 기증했다.

조제프는 모차르트의 두개골을 동료 의사인 루드비히 아우구스트 프랑클에게 보여줬다. 프랑클은 두개골을 꼼꼼히 조사했다. 두개골 아래턱에는 철사 고리가 걸려 있었다. 위턱에는 오른쪽에 다섯 개, 왼쪽에 두 개의 치아가 붙어 있었다. 아래턱에는 오른쪽에 두 개, 왼쪽에 3개의 치아가 남아 있었다.

프랑클은 24년 후인 1892년 1월 8일 〈노이에 프라이에 프레세〉 신문에 글을 실었다. ‘모차르트의 두개골 발견되다’라는 제목이 달려 있었다. 어떻게 해서 이 두개골이 그에게 왔는지, 왜 모차르트의 것이라고 생각하는지를 설명하는 글이었다. 그의 기고는 폭발적인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프랑클은 1901년 모차르트의 두개골을 잘츠부르크에 있는 모차르트 생가에 전시했다. 이듬해에는 아예 모차르테움 재단에 기증했다. 콘스탄츠가 1841년 남편을 기리기 위해 잘츠부르크에 세운 재단이었다. 학생들에게 종교음악과 관련한 역량을 길러주는 게 설립 목적이었다.

모차르테움은 이름에 걸맞게 잘츠부르크 음악의 중심지가 됐다. 이곳에서는 매년 각종 콘서트와 음악 행사가 다양하게 열린다. 학생들은 이곳에서 공부를 마치면 모차르테움 잘츠부르크 오케스트라에 들어갈 수 있다.


■진실은 의문으로

모차르트의 두개골을 구경하려고 많은 사람이 모차르테움 전시실을 찾았다. 재단은 지난 2006년 두개골의 DNA를 검사하기로 했다. 정말 모차르트의 두개골이 맞는지 유전학적으로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연구팀은 모차르트 외증조모 및 조카의 넓적다리뼈에서 채취한 DNA를 두개골과 비교했다. 그런데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두개골의 DNA는 두 사람의 뼈에서 얻은 DNA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당황한 모차르테움은 결론을 유보한다고 발표했다.

두개골이 모차르트의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두개골에 남아 있는 심각한 타격 흔적이었다. 모차르트는 죽기 1년 전에 머리를 심하게 얻어맞은 적이 있었다. 그는 죽기 전에 늘 두통에 시달렸다. 머리를 얻어맞은 후유증이었다.

모차르트의 두개골은 아직도 모차르테움에 있다. 다만 이전과는 달리 일반 관람객이 자유롭게 볼 수는 없다. 해설사들이 설명해주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약하면 두개골 관람을 허락받을 수도 있다. 글·사진=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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