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이기심 넘어 함께 잘사는 ‘모두의 경제’를 모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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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지노 브루니다



20세기에 사회주의는 현실 국가로 등장했다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에릭 홉스봄은 “20세기는 사회주의 실패를 증명한 세기였다”고 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는가. 신자유주의 기치를 높이 든 무자비한 자본주의인가. 토마 피케티 같은 이는 <21세기 자본>을 통해 자본주의는 갈수록 소득과 부의 불평등을 심화할 거라며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회주의·신자유주의 사이 제3의 길
선의·배려 만나는 ‘관계 회복’ 중시

<콤무니타스 이코노미>는 모두를 위한 경제, 더불어 잘 사는 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책이다. 지은이는 이탈리아 경제학자 루이지노 브루니다. ‘모두를 위한 경제(콤무니타스 이코노미)’의 유명한 운동가다. 사회주의와 신자유주의, 그 사이의 길을 모색한다. 이 책은 시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외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공식화했으며, 자본주의 마지막 보루인 시장은 문명의 결실이자 승리라고 한다. 다만 이기주의에 너무 사로잡혀 망각해버린 ‘형제애’를 되살리자고 이 책은 주장한다. “현시대의 시장 중심 사회는 자유를 위해 형재애를 희생했다”는 진단인 것이다.

성경을 빌리면 아담이 선악과를 삼키려다 “아담아”하고 부르는 소리에 켁 하면서 놀라 선악과가 목에 걸린다. 성경의 ‘아담’과 고전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는 이름이 같다. 아담의 목에 걸린 선악과는 애덤 스미스가 공식화한 ‘보이지 않는 손의 이기심’이다. 그 이기심이 지금 인류의 목에 걸려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뱉어내야 한다는 거다.

무슨 말인가. 인간은 계산과 이익만 좇으며 행동하는 게 아니라는 거다. 인간은 이기적 인간이 아니라 관계적 인간이며 형제애를 지닌 인간이라는 거다. 상대방이 손해를 입고 나를 배려해줬을 때 나도 기꺼이 적은 보상이나 손해를 감수한다는 말이다. 행복은 경제적 계산과 이익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배려나 양보에도 있다는 소리다. 이것이 행복의 역설이다. 요컨대 최고 부자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행복에는 이익과 이기심, 계산 이외의 다른 요소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 책은 시장이 이익의 혈투로 이뤄진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애덤 스미스가 잘못 봤다는 거다. “시장의 교환 관계는 계약의 두 당사자에게 인간적 상처를 주지 않도록 설계되었다.” 가격을 매길 수 없어 계산에 넣지 못했던 이 점을 ‘관계재’, 곧 ‘무상성(無償性)’이라고 이 책은 공식화한다.

그래서 차갑고 싸늘한 계약으로만 덮어씌어 놓은 시장에 온기를 불어넣자고 한다. 그 온기는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다. 나의 선의와 상대의 배려가 서로 만나는 ‘진짜 만남’ ‘진정한 관계’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거다. 시민경제, 연대경제, 독립부문, 자원활동조직, 제3부문, 비영리조직 등으로 단순히 환원될 수 없는, 그 이상의 것을 인류가 찾아나가자고 이 책은 제안한다. 연구자 9명이 2년간 공동 번역한 책이다. 루이지노 브루니 지음/강영선 등 옮김/북돋움/312쪽/1만 7000원. 최학림 선임기자 the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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