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형상미술 선구자’ 이태호, 그림 인생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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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형상미술의 선구자’ 이태호 작가의 그림 인생을 들여다본다. 이태호전 ‘긴 여로의 우리는 하나의 과정이자 끝맺음일 뿐’이 오는 29일까지 부산 해운대구 우동 신세계갤러리 센텀시티에서 열린다. 첫 개인전 전시작부터 대표작 ‘억새’ ‘물-결’ 시리즈와 올해 최신작까지 소개한다. 30여 점의 작품을 연대별로 따라가면 작가의 작업세계를 이해하기 쉽다.


29일까지 신세계갤러리 센텀시티 전시
초기작 ‘회상’·억새·물결 30여 점 소개
봉준호·이재용 담은 올해 신작도 첫선

■존재와 소외







1981년 작 ‘회상’은 네거티브와 포지티브로 존재하는 것과 드러난 것을 아우르는 형태를 보여주는 초기작이다. 그는 한때 세포, 우편 소인 등을 그리는 개념적 작업을 했으나 어느 순간 공허감이 느껴졌다고 했다. “나무줄기와 잎은 보는데 뿌리는 보지 못하는 것 아닌가, 시대 흐름과 무관하게 나는 누구인지 그림으로 질문을 던져보자 생각했다.” 보이는 것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것을 네거티브로 표현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세 개의 자화상’은 표정에서 읽는 것과 전체를 보고 느끼는 것이 다름에 주목했다. 과거 일본 개인전 때 ‘자화상에 왜 얼굴이 없느냐’는 질문을 받고 그는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이태호이지만 그걸로 진짜 이태호를 얼마나 알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사람과 벽’ 시리즈는 하나의 이론 체계를 세우고 그것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고, 해당하지 않는 것은 소외시키는 ‘근대’를 비판한 그림이다. 10호 남짓한 크기의 작품은 영화 ‘엘리펀트 맨’의 한 장면을 따온 것으로, 1989년 서울 금호미술관 개관기념 ‘80년대의 형상미술전’ 포스터에 실렸다.



■철마로 가다

서른 살 이태호 작가는 고등학교 미술 교사직을 내려놓았다. 9년 뒤엔 모든 것을 마무리하고 철마로 이주했다. 전업 작가의 길을 선택했지만,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는 못했다. “작업실이 생기면 다 잘할 줄 알았는데 내가 배운 것, 근원적인 것에 의심이 생겼다. 동네 입구에서 길을 내기 위해 큰 소나무를 베고 있는 것을 봤다.” ‘훼손’에 대한 작업의 시작점이다.

‘베어진 소나무’와 ‘숲으로’ 시리즈를 통해 훼손은 기술이나 제도의 문제가 아닌 인간 중심의 세계 이해에서 온다는 것을 표현했다. 1999년 이 작가는 유화 작업을 일단락 짓게 된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을 갔는데 유화 물감의 속성이나 사고방식이 느끼하게 느껴졌다.”

가벼운 드로잉을 해볼까 싶어 쓰기 시작한 먹이 작가의 체질에 잘 맞았다. 먹과 목탄으로 그린 ‘그날 9.11’에는 군데군데 빨간 점이 찍혀 있다. 불안과 불길의 느낌을 상징하는 것이다. 작가는 “그림 속 주름에 더 집중해달라”고 당부했다. 이 주름들은 이후의 물 작업으로 연결된다.



■억새 그리고 물결

“청도 운문사를 갔는데 화단에 느닷없이 억새 한 다발이 서 있더라. 저리 대접해서 귀하지 않은 존재가 어디에 있겠느냐 생각했다.” 자신은 다른 존재를 그리 귀하게 대했던가를 생각하며 풍경이 아닌 주인공으로의 억새를 그렸다. 50점 정도 억새 시리즈를 한 뒤 그의 작업은 물로 넘어간다. “40~50점 정도 작업을 하고 나면 더 이상 같은 주제를 그릴 수 없다. 내가 지겨워서 못 견딘다.”

이태호 작가는 불면증으로 고생하던 시절 이야기를 했다. 의사가 그에게 밤낚시를 제안했다. 발밑에서 시커먼 바다가 일렁이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 삶의 여정을 끝내게 된다면 간직하고 가져갈 기억 중에 이 풍경도 포함될 것 같다.’ 그에게 바다 그림은 춤추는 것과 같다. “줄타기처럼 호흡을 맞추고 기우뚱거리며 균형을 찾는 것이 사는 일인 것 같다. 그림도 그렇다.”

바다 작업이 너무 뭔가를 호소하려는 것 같아 다시 변화를 꾀했다. 이번 전시에서 첫선을 보이는 올해 신작은 물결을 품은 사람들의 모습이다. ‘어느 감독’은 봉준호 감독, ‘어떤 사과’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모델로 했다.



■그림, 끝없는 질문

이 작가의 작업은 시기별 특징, 소재, 재료가 다 다르다. 그렇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존재 바로 보기’로 통한다. “내 안에서 축적되는 것이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태호를 안에서 끄집어내고 보니 진짜 이태호는 전부 밖에 있더라.”

그는 그림을 그리며 한 달에 30일은 ‘졌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작가는 기척을 듣는 사람이다. 말이 되면 벌써 지나간 일이 된다. 답을 찾는 순간 질문이 끝나기 때문에 계속 물어보는 과정으로서의 작업을 이어가려 한다.” ▶‘긴 여로의 우리는 하나의 과정이자 끝맺음일 뿐’=29일까지 신세계갤러리 센텀시티. 051-745-1508.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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