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고졸’이 부끄럽지 않은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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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익 사회부 행정팀장

오랜 동네 친구가 있다. 누구보다 활달하고 밝았던 그는 학창 시절 공부를 곧잘 했다. 어느 친구보다 손재주가 있었고 기계 다루길 좋아했다. 좀 더 빨리 돈을 벌어 생계에 보탬이 되고 싶었던 친구는 꽤 입학 경쟁이 있는 공업계 고등학교 진학을 선택했다. 졸업 후 중소기업에서 한참 동안 일하다가 자영업으로 전향한 그를 때때로 만나면서 그 어떤 학력 격차, 거리감을 느끼지 못했었다. 어떤 주제를 얘기해도 막힘이 없었고, 오히려 이런 저런 사회 경험이 많아 남다른 삶의 지혜를 품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어느 술자리에서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내가 대학에 갔다면 내 인생이 좀 다를까?” 숨겨두었던 내밀한 마음을 30년이 다 되어서야 터놓은 친구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사회 생활을 하면서 ‘어느 학교 나오셨어요?’ ‘몇 학번이에요?’ ‘전공이 뭔가요?’류의 질문이 가랑비에 옷 젖듯 스며들어 요즘 말로 ‘멘붕’ 상태가 됐다고 한다. ‘졸업장 꼬리표’가 평생 콤플렉스이자 트라우마가 된 것이다.

극단적 경쟁·학벌 중심 한국 사회
청년층 근본적 개혁 목소리 거세져
본보 온오프라인 청년 기획 ‘고졸’
“이제 뭔가 해야 한다” 나비효과 기대

친구는 아이들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교육비에 정말 많은 돈을 써왔고, 앞으로도 아낌 없이 투자할 거라고 한다. 좋은 대학을 보내기 위해서다. 아내도 고졸이었는데, 직장에서 더이상 승진이 되지 않는 철판 지붕을 경험 중이다. 그러니 “고졸입니다”란 대답을 듣는 순간 뒤따라 오는 야릇한 그 눈빛을 아이들에게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단다. 그가 차갑게 말했다. “아무리 세상이 뒤집어져도, 학벌만 따지는 이 나라가 바뀔 것 같지 않아.”

<부산일보>가 최근 온·오프라인 기사와 영상으로 선보인 청년 기획 ‘나는 대학민국 고졸이다’는 그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냈다. 대한민국 노동자의 절반 가까이가 고졸이지만, 세상의 관심은 온통 대졸 취업난, 대학 입시,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합격자 수와 같은 경쟁 교육의 대명사들에 쏠릴 뿐이다.

8차례 나눠 실은 콘텐츠를 차례로 접한 독자들은 진심 어린 다양한 피드백으로 <부산일보>에 응답했다. 특히 기사에 달린 댓글 대부분이 긴 글이었다. 몇 마디 던지고 말 일이 아니라 생각한 것이다. 자신을 대졸이거나 고졸 혹은 초졸, 중졸이라 밝힌 독자들의 삶이 가진 현실적인 한계부터 이미 스펙을 위해 많은 비용을 들인 이들의 억울함까지 여러 스펙트럼으로 이 문제를 드러내고, 논쟁하고, 소통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천차만별이었지만 모두 하나의 지점을 향하고 있었다. ‘정말 이대로는 미래가 없다’는 것이다.

최근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통계만 봐도 이는 명확하다. 2017년부터 3년간 국내 기업의 임금 통계를 근거로 올 6월 기준 평균 임금을 추정했더니, 직원 500명 이상 기업의 경우 고졸 직원이 대졸자 임금의 70.2%를 받았다. 이는 100명에서 499명 규모 기업에서 59.2%까지 뚝 떨어졌다. 사정이 이러하니, OECD에 따르면 대졸 이상 고등교육을 이수한 비율이 24.4%에 그친 한국의 부모 세대(55~64세)는 자식이 ‘루저(패배자)’로 살아가지 않도록 오로지 좋은 대학으로 내몰아 청년 세대(25~34세)의 69.8%가 대학에 진학하는 어느 나라에도 없는 기형적인 사회를 고착화시켰다.

부모 세대는 대학 입시에 더욱 목을 매고, 소중한 청소년과 청년들은 고통스런 삶의 무게를 지고 가다가 대열을 이탈하기 일쑤다. 이미 세계 최고 수준에 달한 자살자 수가 그 증거다. 사실 ‘대학민국 고졸’ 문제는 어떻게 풀지 누구도 답하지 못할 거대하게 얽힌 실타래와 같다. 그래서 <부산일보> 기사에는 “그래서 어쩌라는 건데?”라는 댓글도 수없이 달렸다.

정부와 지자체는 공공기관의 고졸자 채용을 의무화하고,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으로 격차와 차별를 해소하려고 노력한다고 홍보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도 똬리를 틀고 앉은 세상을 흔들지 못하고 있다. 법조계나 정·관계에선 여전히 출신 학교와 고향 등을 공공연히 묻고, 공유하고, 또 그들끼리 뭉치는 문화가 여전하다. 정작 누군가가 어떤 일을 해냈는지, 어떤 잠재력을 가지고 꿈을 이루려 하는지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비정상 속에서 경쟁과 생존만 외치는 사회다.

중앙대 독문과 김누리 교수는 “우리 사회, 우리 교육은 과연 공정한가”라는 화두를 연구실을 찾은 <부산일보> 취재팀에게 툭 던졌다. 이미 운동장이 기울어져 있는데, 공정이란 말로 게임의 룰만 강조해 경쟁 중독 사회만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공정한 경쟁’을 내세우려면 우리에겐 개혁이든, 혁명이든 특별한 그 무엇이 필요하다. 다음 달 3일이면 수능이다. r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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