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휘휘 돌아 멈춘 ‘바람 담은 탑’… 오늘도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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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인문학 기행] 20. 그리스 아테네 ‘바람의 탑’

그리스 아테네의 중심지인 아크로폴리스 아래 로마 포룸 인근에 팔각형 ‘바람의 탑’이 우뚝 서 있다.

그리스 아테네에는 매일 바람이 분다. 날씨가 화창한 날이건, 비가 오는 날이건, 눈이 내리는 날이건, 구름이 잔뜩 낀 날이건 상관하지 않는다. 지금도 그렇고 옛날에도 그랬다. 아테네의 바람은 이올루스 거리에 있는 ‘바람의 탑’에 모여들었다가 흩어진다. 이곳은 아테네를 감도는 모든 바람의 집이다. 아테네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바람의 탑’은 아크로폴리스 아래 로마 포룸 인근에 서 있다.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고, 잡초가 무성한 폐허의 유적지에 혼자 멀쩡하게 살아남아 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엉망이 된 이후 얼마나 오랫동안 이 탑이 외롭게 살아 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아테네 로마 포룸 인근에 서 있는 유적
BC 1세기 건축가 안드로니쿠스 작품
시간 알고자 했던 당시 사람들 간청에
해시계·물시계 갖춘 탑 만들어
8각형의 탑 꼭대기엔 8명의 신 새겨져
유난히 바람 많은 그리스 정서 묻어나

■바람을 사랑한 안드로니쿠스

‘바람의 탑’은 BC 1세기 무렵 바람을 사랑하고 별을 사랑했던 건축가 안드로니쿠스 키레스테스가 만든 작품이었다. 당대 최고 건축가였던 그가 탑을 만든 것은 아테네 사람들의 간청 때문이었다. 아테네 사람들은 그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아크로폴리스와 아고라 사이에 물시계를 갖춘 탑을 지어주시오.”

사람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정확한 시간을 알기 어려웠다. 밤에는 시간을 알아보려고 별을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무슨 별이 지나가나요?”

안드로니쿠스는 시간을 조금도 낭비하지 않고 서둘러 탑을 건설했다. 탑 한쪽에는 물탱크를 갖춘 물시계와 해시계를 설치했다. 아테네 사람들은 무척 기뻐했다. 이제 물시계가 생겼기 때문에 별을 볼 필요가 없어진 것이었다. 그들은 탑을 ‘클렙시드라’라고 불렀다.

그런데 안드로니쿠스에게 중요한 것은 물시계가 아니었다. 그는 사랑하는 ‘바람’을 탑에 담고 싶었다. 1년 365일 그리스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슬픔, 분노, 좌절은 물론 기쁨, 희망, 인내를 담은 바람이었다. 그는 세상에 부는 모든 바람을 다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탑을 8각형으로 만들어 8개의 바람을 새겨 놓기로 했다.

시루스에서 태어나고 자라 젊은 시절을 보낸 안드로니쿠스는 그리스의 바람을 깊이 공부했다. 특히 ‘바람의 신’인 이올루스를 좋아했다. 이올루스의 집은 시칠리 섬 북쪽에 있는 이올리아 섬의 높은 산 속 동굴이다. 안드로니쿠스는 마치 여러 번 가본 것처럼 동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올루스의 동굴은 세상 모든 바람의 집이 아닐까? 세상 모든 바람은 이올루스가 풀어놓을 때까지 동굴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닐까?’

안드로니쿠스는 바람도 사람만큼이나 변화무쌍한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약한 바람이 있는가 하면 강한 바람도 있다. 변덕이 심한 바람이 있는가 하면 꾸준한 바람도 있다. 아무것도 못하는 바람이 있는가 하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바람도 있다. 인간이 ‘구름’이라고 부르는 큰 가방의 입을 이올루스가 풀어놓고 바람에게 명령을 내리면, 바람은 사람들이 기쁨, 슬픔이라고 부르는 일들을 하곤 했다.

안드로니쿠스는 바람에 얽힌 많은 이야기도 알고 있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던 이야기는 ‘오디세우스와 이올루스’였다.10년 동안의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귀향하던 오디세우스는 우연히 이올루스의 궁전에 들렀다. 한 달 동안 그곳에서 머물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궁전을 떠날 때에는 서풍을 제외한 모든 바람이 들어있는 보따리를 선물로 받았다. 그는 고향인 아티카가 눈앞에 보일 때까지는 절대 잠을 청하지 않고 보따리에 든 바람을 잘 이용해 배를 안전하게 몰았다. 하지만 눈앞에 나타난 고향의 항구를 본 오디세우스는 긴장이 풀려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인간은 질투와 의심의 동물이다. 부하 선원들은 이렇게 의심했다.

‘보따리에 온갖 보물이 다 들어 있을 것이다, 오디세우스가 독차지하려고 한다.’

부하 선원들은 보따리를 풀고 말았다. 보따리에 있던 모든 바람은 동시에 뛰어 나왔다. 배는 방향을 잃고 여러 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렸다. 그들은 손만 뻗치면 닿을 것 같았던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바람의 탑에 사는 여덟 신

이올루스 거리에서 봤을 때 탑 북쪽에는 장화를 신고 긴 가운을 입은 보레아스가 있다. 발과 어깨에 날개를 달고 있는 그는 하늘을 날면서 조개껍데기로 바람을 불어댄다. ‘강풍’인 그가 언덕 꼭대기에 내려와 발걸음을 성큼성큼 내디디면 그의 길을 막고 선 참나무 뿌리가 뽑히고 배가 뒤집힐 정도다.

옆면에는 늙은 노인이지만 보레아스만큼 활기가 넘치는 ‘북동풍의 신’ 칼리키아스가 있다. 그는 손에 방패를 들고 다닌다. 방패에서는 싸락눈이 나온다.

이어 ‘동풍의 신’ 아펠리오테스가 나온다. 아테네의 산과 바다에 짙은 안개가 끼는 날이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펠리오테스의 날개가 펼쳐졌구나.”

아펠리오테스 옆에는 ‘남동풍의 신’ 에우루스가 있다. 얼굴에 수염이 가득하고, 오만상을 하고 있는 신이다. 그는 폭풍을 몰고 다니면서 때로는 눈을 녹게 만들고, 거꾸로 폭우도 내리게 한다.

아크로폴리스를 마주보는 남쪽에는 노투사가 있다. 비를 몰고 오는 ‘남풍’이다. 옷을 거의 입지 않고 맨발로 다니는 젊은 신이다. 그는 뒤집힌 항아리를 들고 다니는데 그곳에서 비가 쏟아져 내린다. 대개 사람들이 좋아하는 바람을 몰고 다니지만 때로는 싫어하는 바람을 보내기도 한다.

노투스 옆에는 역시 맨발인 립스가 있다. 그는 배 꼬리에 다는 장식물을 들고 다닌다. 배가 안전하게 귀향할 수 있게 돕는 바람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선원들은 여러 바람 중에서 그를 가장 사랑했다.

‘바람의 탑’ 서쪽은 아고라를 마주보고 있다. 그곳을 떠도는 바람은 ‘서풍의 신’인 제피로스다. 옷소매에서 꽃을 흩뿌리는 젊은 신이다.

제피로스 옆에는 ‘북서풍의 신’ 스키론이 서 있다. 대지를 말라붙게 할 것처럼 탈 듯이 뜨거운 바람을 상징하는 화로를 들고 다니는 노인이다.

이렇게 해서 안드로니쿠스가 만든 ‘바람의 탑’에는 바람의 신 8명이 모두 모였다. 안드로니쿠스는 ‘바람의 탑’을 만들 때 이렇게 생각했다.

‘모든 바람이 이올루스의 궁전에 모여 산다면, 아테네에 탑을 지어 그들이 옮겨 살도록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힘들게 늘 먼곳에서 아테네까지 여행을 올 필요는 없잖아.’

안드로니쿠스의 생각처럼 ‘바람의 탑’이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여덟 신은 이올루스의 동굴에서 나와 이탈리아를 지나 그리스 여러 도시를 거치는 긴 여정 끝에 아테네까지 왔다. 당연히 어렵고 힘들고 먼 길이었다. 탑이 만들어진 이후 그들은 불편을 덜게 됐다.

아테네의 모든 바람은 늘 ‘바람의 탑’ 주변을 맴돈다. 때로는 탑 안에 잠시 들어가 쉬었다 가기도 하고, 바쁜 일이 있으면 서둘러 나가기도 한다. 아테네에 밤이 왔다.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다. 어떤 바람의 신일까. 서둘러 ‘바람의 탑’에 달려가서 누가 탑 밖으로 마실을 나왔는지 살펴봐야겠다.-끝-

글·사진=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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