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삼동 아낙들 어물 한가득 이고 넘던, 고개고개 눈물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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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함께하는 고개와 길] 692. 영도 청학고개

영도 청학고개 전경. 청학동·동삼동과 영선동을 잇는 봉래산 산길 청학고개는 고개고개 눈물고개, 아리랑고개였다. 지금은 고될지라도 나중을 기약하고 오늘은 고될지라도 내일을 기약하던 희망의 고개이기도 했다. 박정화 사진가 제공

“이 길이 옛날부터 있던 아리랑고개요.” 청학고개는 예명이다. 본명은 아리랑고개다. 버스정류장 명칭은 비록 청학고개지만 토박이 입에 붙은 이름은 아리랑고개다. 고갯마루 맛집 주인 역시 아리랑고개가 입에 붙었다. 청학초등학교를 1965년 졸업한 여기 토박이라서 말끝마다 아리랑고개, 아리랑고개 그런다.

오프라인만 그런 게 아니다. 온라인도 그렇다. 인터넷에서 ‘부산 청학고개’를 검색하면 버스 노선이 먼저 뜨지만 ‘부산 아리랑고개’를 검색하면 지도와 함께 지식백과며 웹사이트에 관련 정보가 수두룩하게 뜬다. 온라인에서도 입에 붙은 말은 아리랑고개다.


1934년 영도다리가 놓이기 전까지
영선동 두 뱃머리는 부산 가던 통로
아리랑고개는 뱃머리로 이어진 산길
부산장 장날 새벽부터 고갯길 북적
동삼동 사람 어물 짐 많아 고됐지만
보릿자루 이고 되넘던 희망의 고개


아리랑고개는 보통명사에 가깝다. 어느 특정 지역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유별나게 까칠하고 까탈스러운 방방곡곡 모든 고개가 아리랑고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장단에 발걸음 보조를 맞추고서야 천신만고 간신히 넘던 고개 중의 고개가 아리랑고개다.

아리랑은 뭔가. 한이 부풀어서 아리랑이고 한을 삭여서 아리랑이다. 아리랑 장단에 맞추며 누구는 한을 곱새겼고 누구는 한을 다독였다. 한을 곱새기며 한을 다독이며 사무치는 한 세월 견뎠다. 가슴 터질 것 같은 한 세월을 건너갔다.

청학에서 봉래. 이름은 어찌 이리 선하고 고고한가. 고개 중의 고개라서 넘기도 전에 마음이 먼저 고꾸라지던 가풀막에 붙은 이름이 하필이면 푸른 학 청학이고 신선이 산다는 봉래다. 이름이라도 선하고 고고하지 않으면 이 험애를 어찌 견뎠으랴. 이 험한 세상을 어찌 건너갔으랴.

영도는 부산에서 가덕도 다음으로 너른 섬. 봉래산을 가운데 두고 청학동, 동삼동, 신선동, 영선동, 남항동, 봉래동이 시계 방향으로 둘러싼다. 지금은 그렇단 이야기고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좀 달랐다. 수군 부대가 주둔하던 절영도, 그리고 청학동이 있었고 동삼동 옛 마을인 구룡동, 영선·대평·남항·봉래를 아우르는 영선동이 있었다.

얘기가 엇길로 새지만 구룡동은 뭘까. 지명에 단서가 있다. 구룡동 구(駒)는 망아지 구. 한자 생긴 거로도 대충은 짐작하겠지만 말을 키우던 마을이 구룡동이다. 지금 목장원이 있는 동삼동 일대다. 구룡동은 군부대 절영도진을 제외하고 인가가 가장 많던 곳. 상하로 나누어 상구룡동, 하구룡동이 있었다.

영선동에는 도선장이 있었다. 부산 시내로 가는 배를 타는 곳이었다. 도선장은 두 군데였다. 지금으로 치면 봉래동에 하나 있었고 대평동에 하나 있었다. 그때는 봉래동도 대평동도 다 영선동이었다. 봉래동 뱃머리는 목도(牧島)라 했고 대평동 뱃머리는 주갑(洲岬)이라 했다. 영도 동쪽 사람은 봉래동 뱃머리를 이용했고 서쪽 사람은 대평동 뱃머리를 이용했다.

영도 건너편 도선장은 지금 롯데몰 부근에 있었다. 한 군데였다. 봉래동에서 출발한 배도, 대평동에서 출발한 배도 이리로 왔다. 도선장은 어시장과 붙어 있었다. 이 어시장은 자갈치시장과 달랐다. 지금처럼 영도대교와 충무동 사이에 있는 게 아니라 영도대교와 중앙동 사이에 있었다. 부산데파트 자리에 있었던 동광동시장의 모태쯤 된다.

도선은 2000년대도 다녔다. 대평동과 지금의 자갈치시장을 오갔다. 이 도선의 원조는 일본인이었다. 대평동에 있던 대풍포가 1926년 매축되자 사업권을 따낸 일본인이 운영했다. 전차 종점을 낀 대평동은 일본인 조선소가 많았고 자갈치는 일본인 거주지역 부평동 일대와 가까웠다. 도선 승객 대부분이 일본인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대목이다.

‘영도 도선 부활’. 대평동과 자갈치시장을 오갔던 도선은 중장년에게 추억이고 로망이다. 도선을 타는 이유는 저마다 달랐다. 영도다리가 막혀서 탔고 바닷바람을 쐬려 탔으며 연인과 시간을 보내려 탔다. 도선을 부활하자는 움직임이 있다. 부활한다면 일본인이 운영하고 주로 탔던 뱃길 대신 영도 사람이 타고 다녔던 원래 뱃길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선동 두 뱃머리는 영도 토박이에겐 궁극이었다. 일본인이 개발한 뱃길이 생기기 이전, 1934년 영도다리가 놓이기 이전 부산으로 가는 통로였던 봉래동과 대평동 뱃머리. 고깃배가 없는 영도 사람은 여기 뱃머리까지 걸어서 갔다. 고갯길 넘고 넘어 마지막 가닿는 종착이자 궁극이 영선동 두 뱃머리였다.

영도 아리랑고개는 영선동 뱃머리로 이어지던 봉래산 산길이었다. 봉래산 저쪽 청학동 사람이 넘었고 청학동과 맞닿은 동삼동 사람은 청학동으로 가서 넘었다. 청학동 사람에게도 고개는 고됐지만 동삼동 사람에겐 훨씬 고됐다. 안 그래도 고된 고갯길이 동삼동 사람에게는 고개고개 눈물고개, 아리랑고개였다.

동삼동 사람은 유독 짐이 많았다. 멀고 가파른 데다 짐까지 많아 이중고, 삼중고였다. 짐은 주로 동삼동 바다에서 잡은 어물이었다. 동삼동 포구 복징포에 복어가 넘쳐났듯 동삼동 바다는 어물이 널렸다. 동삼동 아낙은 저마다 어물을 한가득 이고서 고개고개 눈물 고개, 아리랑고개를 넘었다. 목청 좋은 누군가는 아리랑을 불렀을 테고 누군가는 따라 불렀으리라.

고개가 붐비는 날은 장날이었다. 지금 롯데몰 자리에 있던 어시장에도 어물을 내다 팔았겠지만 조선의 시장 범일동 부산장 장날이면 고갯길은 새벽부터 부산했다. 말 그대로 ‘부산스러웠다.’ 지금은 고될지라도 나중을 기약하며, 오늘은 고될지라도 내일을 기약하며 넘던 청학고개, 아리랑고개. 어물 대신 보릿자루 이고서 되넘던 아리랑고개는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소원하는 희망의 고개였다.

방울꽃길. 장미계단길. 목련길. 참새미길. 청학고개는 이제 신수가 훤하다. 산길은 도로가 되어 부산 바다를 내려다본다. 하지만 청학고개로 이어지는 곳곳의 골목길은 여전히 비좁고 가파르다. 아리랑 한 소절 저절로 나오지 싶다. 다행히 골목길 이름은 하나같이 곱다. 방울꽃이 달랑대고 줄장미가 계단을 이룬다. 하루하루 고됐지만 심성은 하나같이 곱던 아리랑고개 ‘영도댁’ 같다.

▶가는 길=시내버스 82번과 85번이 청학고개를 지나거나 청학고개가 종점이다. 고개 걷는 맛을 좀 보려면 청학시장 뒤편으로 올라가도 된다.

동길산 시인 dgs1116@hanmail.net

이 기획은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도움을 받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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