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을 앓고 알았다 마침표 아니라 일상 이어갈 쉼표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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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경험자 지원 ‘쉼표’ 서지연 대표

젊유애는 지난해 유방암 항암치료를 마친 젊은 암 경험자를 대상으로 화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서지연 대표(왼쪽에서 두 번째)와 20대·30대 환우, 암 비경험자지만 재능기부로 참여한 김수희 메이크업 아티스트(서 대표의 왼쪽)가 함께했다. 말풍선은 젊유애의 심층면접 조사에 참가한 젊은 암 경험자들의 발언들. 쉼표 제공

암 경험자에게도 삶은 계속된다. 국내에서 암 진단 이후 5년 넘게 생존한 암 환자는 2017년 국가등록암통계에서 처음으로 100만 명을 넘겼다. 전체 암 유병자의 절반을 넘는다(55.7%). 유방암의 5년 생존율은 92.7%. 젊은 암 경험자의 삶은 더더욱 길게 계속된다.


30세에 유방암 진단 뒤 치료 중
항암 치료보다 힘든 건 주변 편견
항암용 가발 나눔하며 단체 설립
젊은 암 환자 사회복귀 정책 없어
암 경험자 일-치료 매뉴얼 구상

■‘젊유애’에서 ‘쉼표’가 되기까지

만 30세.

서지연 씨가 유방암 진단을 받은 나이다. 일본살이 6년째, 통번역과 대외협력 관련 컨설팅 일로 눈코뜰 새 없이 바쁠 때였다. 진단 바로 다음날 귀국해 재검사를 받았고, 수술 사흘 뒤 남편은 예정됐던 MBA 유학을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혼자 병실에 남은 그는 유방암에 대한 논문을 파고 들었다.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이었다.

“2기 판정을 받았으니 생존율이 높다는 건 알았어요. 그래도 암에 대한 인식이 워낙 절망적이고 배경음악이 ‘두둥’하고 깔릴 것 같은 심각한 질병이니까 팩트가 필요했어요. 항암 치료에 대한 걱정도 앞섰고요.”

더 힘든 건 젊은 암 환자를 별나게 보는 시선이었다. 결혼과 출산, 암 보험 가입 여부에 대한 질문까지 모두 상처로 돌아왔다. 답답해서 찾아간 포털의 대규모 유방암 환우 카페에서는 환자들끼리만 더 고립되는 느낌을 받았다. 20~30대 젊은 암 환자들이 생각보다 많고, 이들이 치료 후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도움을 받을 곳은 좀처럼 없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래서 2018년 11월, 비영리단체 ‘젊유애’(젊은유방암애프터케어)를 설립했다. 많게는 수백만 원이 드는 항암용 가발 나눔 활동을 시작하면서 SNS를 통해 2030 환우들이 하나둘씩 모였다. ‘직장을 잃을까봐 암밍아웃(암+커밍아웃의 합성어)을 못하고 가발을 쓰고 다닌다’, ‘복학을 앞두고 있는데 투병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아 인스타그램 업로드를 못한다’, ‘암 환자라는 이유로 파혼을 당했다’ 같은 당사자들의 이야기들도 들을 수 있었다.

젊유애는 카카오의 사회문제정의 협업 플랫폼 ‘100up’과 부산시의 청년커뮤니티 지원사업 등을 거치면서 ‘젊은 암 경험자의 사회복귀 지원’으로 방향성을 구체화했다. 전국의 회원은 750여 명으로 늘었고, 최근에는 여성가족부 사단법인 ‘쉼표’로 전환했다. 암 경험은 모든 기회를 잃어야 하는 마침표가 아니라 일상을 이어가기 위한 쉼표여야 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제도 개선과 인식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목표다.



■재발보다 두려운 경력단절

현실은 젊은 암 경험자에게 ‘쉼표 다음’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젊유애가 만 19~39세 유방암 치료를 마친 3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를 보면 치료 전에는 86.8%가 취업·창업으로 인한 소득이 있었지만 이들 중 90%가 치료 후 소득이 없는 상태가 됐다. 이들의 치료 전 월 가구소득은 200만 원대(35.8%), 100만 원대(34%) 순이었으나 치료 후에는 평균 171만 원이 하락해 100만 원 이하가 43.4%로 가장 많아졌다.

암 진단 후 6개월간 직업이나 고용 상태가 변화한 원인(중복선택)으로 6개월 이상의 긴 치료기간(67.9%), 치료 기간 면역력 저하(64.2%), 집중치료기간 잦은 통원으로 인한 근태 관리(34%), 회사의 권고사직(33.2%) 순으로 나타났다. 젊은층은 중장년층과 달리 암 보험 가입자는 적고 1인 가구는 많다. 경제적인 문제가 심각할 수밖에 없다 .

상황이 이런데도 치료 이후 삶에서 걱정되는 것으로 경제적 문제(70%)보다도 경력단절(78%)을 더 많이 꼽았다. 일을 이어갈 수 없다는 것이 가족관계(57%)나 타인의 인식(44%)은 물론 유방암에서 특히 많은 재발(75%)보다도 높게 나타난 것이다. 국가 암검진대상(만 40세 이상)이 아니고 자가검진에 대한 교육도 부족해 평균 2.5기로 진단이 늦다는 사실도 함께 드러났다.

사회 복귀를 어렵게 하는 원인의 선두에는 암 경험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있다. “채용 과정에서 경력의 공백을 설명하려면 암 경험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데 기업은 병력을 알게 된다면 채용하지 않을 거라는 입장입니다.” 서지연 대표는 실제 기업 채용 담당자와 면담한 결과를 이렇게 전했다. 업무 능력이나 체력 저하, 잦은 통원으로 인한 근태 등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암 진단 이후 권고사직도 공공연하게 이뤄진다.

심층면접에 참가한 젊은 암 경험자들은 말한다. “보통 1년 정도 치료가 끝나면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는 상태가 되고 통원도 연 3~4회면 되는데 기업이 공정한 기회를 부여하지 않는 것은 차별이다.” 90일까지 병가가 보장되는 대기업 직원도 초조하기는 마찬가지다. “치료가 길어지고 있는 데다 남자가 많은 팀 특성상 유방암에 대한 이해도도 낮아서 복직에 대한 확신이 줄어들고 있다.”



■누구나 아플 수 있으니까

젊은 암 환자의 증가세는 뚜렷하다. 20대와 30대의 암 발생(2018년)은 전년 대비 각각 44.5%, 12.9% 늘었다. 특히 전국 5대 암 환자 중 20~30대(2019년)는 여성(3만5884명)이 남성(4152명)의 8.6배나 많다. 부산에서도 최근 4년간 만 19~30세 암 발생은 25.3%나 증가했고, 같은 연령대 유방암 조발생률(여성 인구 10만 명당 발생자)도 29.2명에서 47.3명까지 뛰었다.

이런 이유로 쉼표는 일단 젊은 암 경험자의 일-치료 균형에 무게를 두고 있다. “특히 20~30대 여성은 일과 결혼, 출산, 육아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는 시기인데도 젊은 유방암 경험자의 사회복귀를 위한 정책은 찾기 힘들어요.” 지난해 부산에서도 출범한 암 생존자 통합지지센터가 있지만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주로 오전에 건강관리 프로그램이 진행되다 보니 젊은층의 수요와는 괴리가 있다는 게 서 대표의 설명이다.

구체적으로는 암 경험자와 기업을 중재하는 캔설턴트(캔서+컨설턴트) 개념을 도입해 일-치료 양립 매뉴얼을 만들고, 젊은 암 경험자를 위한 맞춤 교육이나 비경험자가 함께하는 인식 개선 프로그램도 구상하고 있다. 캔설턴트 양성 과정이나 스타트업 지원을 통해 직접적인 경력단절 해소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다. 장기적으로는 암뿐만 아니라 다양한 질병으로 사회 이탈이 발생한 청년 모두를 위해 범위를 넓힐 계획이다.

“젊은 암 경험자들이 하나같이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특혜를 바라는 게 아니라 일상을 그대로 이어가기를 바란다는 거죠. 아프다고 해서 배제되거나 고립되지 않는 사회가 궁극적으로 청년뿐 아니라 모두를 위해 더 나은 사회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아플 수 있으니까요.” 최혜규 기자 iwil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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