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은 한국 ‘근현대사 최전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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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탄생 / 유승훈

우리나라는 중앙정부 부처 일부를 세종시로 분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부분이 서울에 집중된 서울 공화국이다. 지방은 갈수록 도외시되고 부산의 존재감은 점점 더 작아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역사의 최전선이 서울이 아니라 잠시 부산이었던 때도 있었다.

부산을 사랑하는 민속학자 유승훈. 그가 소개하는 부산이 겪어온 파란만장한 이야기보따리 <부산의 탄생>은 모두 3부로 구성돼 현대, 근대, 조선의 부산을 흥미롭게 풀어낸다. 정치, 경제, 문화를 종횡무진하는 다채로운 이야기에 실감 나는 사진들이 더해져 어디서도 쉽게 볼 수 없었던 ‘생생함’과 ‘진짜’ 부산을 만난다.

민속학자 유승훈 ‘파란만장’ 부산 얘기
현대·근대·조선 등 모두 3부로 구성
6·25전쟁 때 3년간 임시수도 큰 역할
근대 조선 관문 기능 등 생생하게 소개

저자는 먼저 현대 부산을 소환한다. 그 지점은 6·25 전쟁이다. 한국전쟁 시절 부산은 대한민국이 절벽으로 추락하기 직전의 ‘막다른 최전선’이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어야 했던 6·25 전쟁이 터지자 이승만 정부는 빗속을 뚫고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내려와 부산을 임시수도로 공포했다. 부산이 3년 가까이 대한민국의 임시수도였는데도 이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몇 없다. 일각에서는 ‘임시수도’ 대신 ‘피란수도’라는 용어를 쓸 것을 제안한다. ‘임시’라는 말에는 수도는 당연히 서울이라는 뜻이 내포돼 있기 때문이다.

피란 시절 국제시장은 우리나라 경제를 좌지우지할 정도였다면 믿겠는가. 1952년경 시장조합에 가입한 점포 수는 1150개였으며 한 점포의 일일 평균 매상이 10만 원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세금을 피하고자 낮춰 부른 것이며, 세무서는 20만 원으로 추산했다. 여기에 2000여 개의 노점과 수천 명의 행상까지 더한다면 국제시장에서 하루 평균 10억 원의 실거래가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명실공히 국제시장은 당시 나라 재정의 버팀목 역할을 했던 것이다.

1960년대 수출산업의 최전선도 부산이었다. 여기엔 경부고속도로의 역할이 컸다. 수도권과 영남권을 잇는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은 물류와 교통의 혁신을 가져왔다. 경부성장축을 통해 바다와 맞닿은 부산은 ‘수출과 무역의 최전선’으로 입지를 다졌다. 이뿐이랴. 부산은 또한 민주주의의 최전선이기도 했다. 1987년 부산의 뜨거웠던 6월 민주항쟁은 전국의 민주화운동을 모범적으로 선도했던 투쟁이었다.

근대 바람의 한가운데도 부산이 있었다. 부산의 초량왜관은 근대가 꿈틀거린 진원지였다. 일본에 무릎을 꿇은 조선은 일명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부산의 초량왜관에 일본인 거류지를 설치하게 해줬다. 이에 부산 거류지의 일본인은 마치 지배자처럼 행동했다. 정작 주인이 되어야 할 조선인은 피지배자처럼 착취를 당했다.

부관연락선의 등장으로 조선은 본격적인 근대를 맞는다. 부산이 근대 조선의 관문이 된 것도 부관연락선 때문이었다. 부관연락선은 근대의 문화를 싣고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건너왔다. 부관연락선에서 내려 첫발을 딛는 곳이 부산항이었기에 일본인은 물론이요, 서양인들도 부산을 통해 조선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래저래 부관연락선이 취항함으로써 부산은 식민지화의 아픈 길을 걷게 된 동시에 국제적인 관문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염상섭이 쓴 근대소설 <만세전>에도 부관연락선이 등장한다. 부관연락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한 주인공 이인화는 ‘부산을 조선의 축소판’이라 말했다. 그랬다. ‘당시 부산의 운명은 곧 조선의 운명’을 상징할 정도로 부산은 그야말로 조선을 집약시킨 축소판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전장의 최전선’이 부산이었다. 임진왜란이 이를 말해 준다. 왜군들이 임진왜란 당시 우리나라에 쌓은 왜성은 동남해안가에만 30여 개에 달한다. 그중 왜군들이 가장 공들여 쌓은 성은 부산의 증산 왜성과 자성대 왜성이었다. 지금은 증산공원과 자성대공원 주변에 파편처럼 군데군데 남아 있지만, 일제강점기만 하더라도 두 왜성은 매우 견고한 형태로 존재했다.

부산은 중대한 역사의 순간마다 외부의 뜨거운 변화와 아픔을 끌어안고 더운 숨을 뱉었다. 또 그때마다 제 이름처럼 기꺼이 가마솥이 되어 주었다. 저자는 말한다. “대한민국 최전선이 부산에서 형성된 때가 있었다. 그 역사는 부산의 역사이면서 중앙과 지방이 서로 힘을 합해 극복했던 대한민국의 역사이기도 했다”고.

<부산의 탄생>은 격변기를 헤쳐온 우리의 역사요 이야기다. 사연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가파른 성장과 화려한 영광 이면에는 고된 노동과 이름 모를 희생도 있었다.

당신은 어떤 부산을 기억하고 있는가? 손안에 어떤 역사를 쥐고 있는가? 시계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역사는 반복된다. 우리는 반쪽 퍼즐을 가지고 미래를 재단하려 했던 건 아닌가 반추해보며 지금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부산의 탄생>이 그러한 작은 실마리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유승훈 지음/생각의힘/512쪽/2만 원.

정달식 선임기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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